워커 중장의 리더십[임용한의 전쟁史]〈104〉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4월 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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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당시 미국 8군사령관이었고, 워커힐의 주인공인 월턴 워커 중장의 별명은 무엇이었을까? 사진만 봐도 답이 나온다. ‘불도그’였다. 그는 학창시절부터 남다른 천재성이나 예민한 지력을 발휘하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패튼 휘하에서 초고속 승진을 했음에도 대부분 사람들은 지장(智將)이라기보다는 용장(勇將), 뚝심의 장군이란 이미지를 간직했다.

6·25전쟁 초기 미군의 지휘관 중에는 무능력자, 부적격자가 너무 많았다. 워커는 일선 부대를 직접 찾아다니며 잘못을 지적하고 수정해야 했다. 호통을 치고 물건을 집어 던지며 지휘할 스타일 같지만, 워커는 화를 내지 않았다. 부대 배치도 못 하는 지휘관을 향해 “당장 여기로 병력을 배치하란 말이야”라고 소리치는 대신 차분하게 전술 강의를 했다. 전술 원리를 가르쳐 주고 “자, 이제 자네라면 어떻게 하겠나”라고 말하는 식이었다. 한시가 급박한 상황에서 워커의 이런 행동은 관찰자들에게 의문이거나 경이였다.

워커의 이런 행동의 답은 직속상관이었던 패튼에게 있다. 패튼이 라인강을 눈앞에 두고 있을 때, 12군단장 에디 소장이 사단장 한 명의 해임건을 의논하기 위해 찾아왔다. 해임 이유는 그가 휘하 연대, 대대의 지휘에 자꾸 간여한다는 것이었다. 패튼은 그것은 확실한 해임 사유라고 동의했다. 그러나 마땅한 사단장을 즉시 구하기 힘들어 한번 교육으로 대체해 보기로 했다. 그 사단장은 자신의 잘못을 깨달았고, 그 뒤로 유능한 사단장이 되었다.

올바른 리더라면 예하 부대의 지휘에 간섭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패튼의 철칙이었다. 워커도 그 철칙이 몸에 배었기에 낙동강 방어선이 결딴날 상황에서 휘하 연대의 위치도 알지 못하고 있는 사단장을 향해 즉석 전술 강연을 펼쳤던 것이다. 한국은 이제 수준 높은 전문가를 보유한 사회다. 그러나 아직도 지시만 하고, 간섭하는 옥상옥이 너무나 많다. 책임은 회피하고, 공은 자신이 가져간다. 그 두꺼운 그늘 아래에서 진정한 애국자와 전문가는 말라 죽어가고 있다.
 
임용한 역사학자
#6·25전쟁#워커 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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