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이건원]설에 며느리와 손주들을 사돈댁에 보냈더니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2월 1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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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원 시인·노인심리상담사
이건원 시인·노인심리상담사
고희의 나이에 친손주 외손주 여섯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정도로 보고 싶었지만, 올해는 사돈에게 양보하기로 했다. 며느리는 친정에 가라고 했고, 딸은 시집에 갔다가 설 연휴에 여행이나 다녀오라고 했다. 그 대신 세배는 동영상으로 받고 세뱃돈은 계좌로, 선물은 택배로 부쳐 주기로 했다. 세태 흐름을 감안하더라도 도저히 상상이 안 되는 배려인 줄은 알고 있지만, 그 대신 내년에는 세배를 받기로 했으니 잠시 참으면 된다고 스스로를 타일렀다. 그러나 인간이기에 이웃집서 아이들이 시끌벅적 찾아와 할아버지 품에 안기는 모습을 볼 때 가슴이 좀 쓰렸다.

아쉬운 것은, 아들과 사위가 올 때마다 내가 너무 좋아하는 막걸리를 들고 오는데 올해는 오지 않는 줄 알면서도 왠지 눈귀는 현관문과 벨소리를 기다렸다. 왜 그럴까, 이게 욕심일까. 막걸리 값이 얼마나 된다고 그리 기다려질까. 아내는 합의한 일이지만, 혹 손주들 들이닥칠까 봐 과일도 사고 식혜와 잡채도 넉넉히 만들어 놓았다.

설 아침 차례를 지내려 형제와 사촌들이 방에 들어서며 “남들은 나이가 차도 결혼조차 잘 못 하는데 그 끌끌한 손주 여섯이 어디 갔냐”고 묻기 시작했다. 사실을 소상히 설명했고 외손주 둘은 나중에 온다지만 친손주 넷과 아들 며느리는 어디 갔냐고 묻기에 대답하기 매우 난처했다. “아니 손주 아들 며느리는 왜 사돈댁에 보냈냐”며 혹 무슨 일이 있는지 의아해하는 눈치가 여실했다.

음복주를 주고받으면서 알딸딸하게 취한 상황에서 올해는 세뱃돈을 계좌로 보냈다고 하니 사람들이 좀 쓸쓸했는지 “그런 게 어딨냐, 아무리 요즘 시대라지만 딸은 시댁, 며느리는 시집이 먼저가 아니냐”며 갑론을박에 매우 시끄러웠다.

오후쯤 손님들이 모두 돌아간 뒤 손주들도 없는 집안은 조용한 절간 같아서 좀 서운한 생각도 부인할 수 없었다. 그래도 결혼한 지 12년째 되는 며느리는 처음으로 친정에서 설을 맞게 됐지 아니한가. 잠시 서운하다고 해도 앞으로는 격년으로 손주 여섯을 사돈에게 양보하기로 했고, 스스로 맘을 토닥이며 쉬려는 참에 휴대전화가 울리는 게 아닌가. 아, 이게 누군가. 며느리의 아버지인 사돈이다. 들뜬 목소리로 “올해는 어째서 우리 딸 얼굴을 보게 해 주셨냐”며 “손주들 덕분에 온 집안을 사람 사는 집으로 만들어 주셨다”고 말했다. 그러곤 우리 사돈끼리라도 자주 만나 약주라도 하자고 약속했다. 전화를 끊고 나도 딸 사돈에게 전화를 걸어 자주 만나 약주 한잔 하자고 새해 덕담을 나눴다.

설이 여자들에게는 스트레스의 주원인이 된다는데, 우리 사돈지간은 앞으로 자식 손주를 서로 보내면서 설날을 보내기로 마음먹었으니 앞으로 내내 변심 않았으면 하고 다짐을 해 본다. 그런데 설에 만든 이 푸짐한 음식은 어떻게 할지 걱정 아닌 걱정이 된다. 에이, 이참에 서먹서먹했던 이웃집과 ‘진정한 이웃’이 돼 나눠 먹어야지 하는 맘에 일일이 옆집들을 찾아 벨을 눌러가며 모셨다. 얼굴은 설지만 생애 처음으로.
 
이건원 시인·노인심리상담사
#설#명절#시댁#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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