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달 전 일이다. 한 정부 관계자와 정부의 대북 ‘레드라인(한계선)’과 관련해 언쟁을 벌인 적이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데이비드 캐머런 전 영국 총리를 만난 자리에서 “북한이 레드라인을 넘어설 경우 우리가 어떻게 대응할지 알 수 없다. 북한이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너지 않기를 바란다”고 발언한 때였다.
기자의 질문 공세에 이 관계자는 여유가 있었다. 엷은 미소를 짓기도 했다.
“글쎄, 어디 사전을 찾아보세요. 레드라인에 대한 명확한 정의가 있는지. 그리고 레드라인이 뭐라고 명확히 밝히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돼요. 말하면 그게 압박이 됩니까?”
그래도 대통령이 직접 언급할 정도면 대략적인 기준선이라도 있지 않느냐는 질문에도 그는 잘라 말했다. “그게 다 외교적 레토릭입니다. 실체가 없어요.”
그로부터 한 달여 뒤 열린 취임 100일 기자회견. 문 대통령은 레드라인에 대한 질문을 받자 ‘시원스럽게’ 답했다. “북한이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완성하고, 거기에 핵탄두를 탑재해서 무기화하게 되는 것을 레드라인이라고 생각합니다.”
기자는 정부가 북핵 레드라인의 수렁에 빠지기 시작한 것은 이때부터라고 생각한다. 당시 대통령의 발언을 듣고 의아했던 것은 기자뿐만이 아니었던 것 같다. 대통령 발언 뒤 정부의 북핵 담당자들이 긴급회의를 가진 것으로 알려졌다. “(발언이) 조율된 게 아니어서 어떻게 대응할지 모르겠다”는 푸념도 나왔다고 한다.
그럼 짜인 각본이 없다던 당시 회견에서 문 대통령이 실언을 한 것일까.
그럴 가능성은 낮다고 본다. 그땐 북의 도발이 한층 고조된 상태였다. 레드라인 질문은 그날 전체 15개 질문 가운데 순서상 두 번째였을 정도로 뜨거운 이슈였다. 청와대가 준비한 예상 질문 리스트에 빠졌을 리 없다. 그렇다면 당시 발언은 대통령의 평소 생각이거나, 핵심 측근들과의 토론 속에 나온 결과물이라고 판단하는 게 합리적이다. 문 대통령은 적극적으로 레드라인을 밝히며 북한을 압박한 것이다.
문 대통령이 레드라인을 구체적으로 거론하며 북한을 압박하려 했던 시도는 일단 실패로 귀결되는 것 같다. 북은 지난달 26일 단거리탄도미사일, 29일 중장거리탄도미사일 발사에 이어 3일 수소탄 핵실험을 감행했다. 9일 동안 세 차례의 대형 도발이다.
그럼 정부 입장이 변했을까. 청와대 핵심 관계자는 핵실험 뒤 기자들과 만나 “북한 스스로도 완성 단계 진입을 위해 이번 핵실험을 했다고 표현한 것을 보면, 아직도 가야 할 길은 남았다고 본다”고 밝혔다. 북한이 일본 히로시마에 터진 핵폭탄보다 최소 3배 이상의 파괴력(위력을 가장 낮게 산정한 정부 발표 기준)을 가진 무기를 손에 넣은 것으로 보이는데도 아직 레드라인을 넘지 않았다고 청와대가 밝힌 것이다.
핵실험 후 국민 불안감은 높아졌다. 금값이 오르고, 주식시장은 출렁였다. 국제신용평가사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는 “한국의 국가신용등급에 하방 압력이 커지고 있다”고 밝혔다.
정부는 이제라도 북핵 레드라인 발언을 자제해야 한다. 언급할수록 자충수에 빠질 수밖에 없다. ‘넘지 않았다’면 북에 도발할 여지를 주는 것이며, ‘넘었다’고 해도 마땅한 대응 카드도 없다. 그 대신 가용할 수 있는 모든 대북 압박책을 말이 아닌 행동으로 보여 줄 때다. 그렇게 해야 ‘레드라인 수렁’에서 벗어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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