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갑식의 오늘과 내일]바둑의 정석, 정책의 정석

  • 동아일보

김갑식 문화부장
김갑식 문화부장
지난달 27일 문화체육관광부가 ‘문화가 있는 날’을 폐지하지 않고 확대 운영하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솔직히 예상 밖의 수(手)였다. 문화가 있는 날은 매월 마지막 주 수요일 각종 공연과 전시 등 문화 이벤트를 할인된 가격에 제공해 국민들의 문화 향유 기회를 늘리겠다는 취지로 시작됐다. 이 정책은 박근혜 정부의 4대 국정기조 중 하나인 문화융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여서 폐지가 점쳐졌다. 가짓수는 적지 않지만 제대로 된 볼거리는 부족하다는 비판도 적지 않아 실효성에 의문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문체부는 이 정책의 확대 운영 방침과 함께 “지난해 말 ‘최순실 국정 농단’ 사태가 터지면서 문화융성과 관련된 문화가 있는 날을 두고 국민들의 부정적인 시선이 커 사업 존폐에 관한 고민이 많았다”며 “하지만 매년 실시하는 만족도 조사에서 사업을 확대 운영하라는 의견이 많아 운영 방식과 날짜를 개편하게 됐다”고 그 배경을 설명했다.

허를 찔렸지만, 그래도 반가운, 문화정책의 희망을 볼 수 있는 묘수(妙手)였다. 문체부는 문화융성과 관련한 부정적 인식에 따른 고민을 솔직히 털어놨고, 문제점이 있지만 국민들이 원하고 있어 제대로 해보겠다는 의지도 밝혔다.

바둑에는 정석(定石)이 있다. 고수(高手)들은 기력이 일정한 수준에 이르면 정석을 잊어야 새로운 수를 볼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정석은 오랜 세월에 걸쳐 고수들의 지혜가 농축된 최적의 수이자 길이다. ‘바둑의 신’으로까지 추앙받는 알파고의 신수(新手)가 정석에 균열을 일으키기는 했다. 그래도 정석은 정석이다.

정부의 정책에도 정석이 있다. 너무 잘 알지만 실천하기가 쉽지 않다는 말도 따라온다. 최근 사석에서 만난 한 고위 관료의 말은 이런 어려움을 여실히 보여준다. “무엇보다 중요한 게 국민 다수의 이익이죠. 그러면 어떤 정책이 어디로 가야 할지 길이 뻔합니다. 그런데 이해 당사자를 포함해 새 정부 출범에 기여한 이른바 ‘공신(功臣)’ 또는 세력이 등장하면 상황이 꼬입니다. 눈치를 보다 가야 할 길로 못 가는 거죠. 정말 공신이라면 자신의 것을 내려놓고, 자기 역할이 끝나면 주저 없이 물러나야죠.”

문재인 정부 출범 초기에 가장 인상적인 장면의 하나는 5월 공개된 청와대 산책 모습이다. 양복 상의를 벗은 대통령과 참모들이 커피를 테이크아웃해 자유로운 모습으로 거닐었다. 사람들의 박수가 터져 나왔다. 청와대가 이 정도로 열려 있다면 이전 정부의 구중궁궐 시비와 비선 실세의 국정 농단은 더 이상 안 볼 수 있다는 안도감 때문이다.

하지만 잇달아 터지는 장관 후보자들에 대한 도덕성 시비와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내로남불’식 합리화는 국민들을 다시 불안 속으로 몰아넣고 있다.

이 와중에 새 정부 출범에 한몫했으니 자기 몫을 달라는 이른바 ‘촛불 청구서’가 새 정부에 밀려들고 있다. 하지만 촛불혁명과 관련한 연구 결과는 청구서 주인의 주장과는 다르다. 전문 시위꾼이 아니라 평범한 시민이 초유의 탄핵과 새 정부 탄생을 이끌었다는 것이다. 서강대에 소속된 정치학자 3인의 연구에 따르면 촛불집회 참가자 중 82.9%가 1, 2회 참석했고 3회 이상 참가자는 17.1%에 그쳤다. 또 ‘친구나 직장 동료, 가족과 함께 참가했다’고 답변한 이가 82%인 반면 ‘정당·단체·동호회 회원과 함께였다’는 답은 3%였다.

문체부의 고민이 담긴 결정은 쉬운 것이 아니었던 만큼 이번에는 제대로 된 문화가 있는 날을 만들기를 바란다. 네 것이냐, 내 것이냐가 중요하지 않다. 이분법에서 벗어나 국민 이익을 잣대로만 옥석을 가리는 게 국정의 시발점이 되어야 한다. 국정의 정석이 두어져야 할 때다.
 
김갑식 문화부장 dunanworld@donga.com
#문화가 있는 날#박근혜 정부 문화융성#내로남불#촛불 청구서

트렌드뉴스

트렌드뉴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