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커피 내리는 목사? 믿음 전하는 바리스타!23일 찾은 서울 용산구의 한 카페 상호는 ‘JESUS COFFEE(지저스 커피)’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일반 카페와 다를 바 없지만 한쪽에 한 평(3.3m²) 남짓의 기도실이 있다. 이곳은 카페이자 교회로 수요일과 일요일에는 예배가 진행된다. 안민호 커피와교회 목사(48)의 노트북 화면에는 ‘必生(필생), 반드시 살아난다’는 문구가 떠 있다. ―필생? 비장하게 느껴진다.(웃음) “개척 교회 설립에 2억∼3억 원이 필요한데 3년 안에 살아남는 것은 10%, 온전하게 성장하는 교회는 1%라고 한다. 2011년 커피와교회를 설립해 지금까지 운영하면서 가슴에 새긴 문구다.” ―왜 하필 커피였나. “신앙을 가진 청년들이 예배는 빠져도 식사와 모임 등 뒤풀이에는 나오더라. 먼저, 사람이 오고 싶은 곳이 되어야 한다는 게 결론이었다. 한국에서는 그게 술집 아니면 카페인데 술집을 할 수는 없으니(웃음), 카페였다. 바리스타 자격증은 나중에 땄다.” ―교회 이름을 ‘커피와교회’로 지은 이유는 뭔가. “상호는 지저스 커피, 교단에 등록된 교회명은 커피와교회다. 사실 지저스 커피는 우리말로 옮기면 예수커피인데 그러면 사람들이 오겠나? 지저스도 같은 의미 아니냐고 하겠지만, 손님들은 예상외로 그렇지 않다. 지저스를 ‘제우스’, ‘제수스’라고 무심코 읽는 분들도 적지 않다. 교회 이름도 어떻게 커피가 앞에 나올 수 있냐는 교단 어른들의 지적도 있었지만 통과됐다.” 커피와교회는 이른바 카페교회의 모범이 됐다. 안 목사는 현재 ‘지저스 처치’라는 연합공동체를 설립해 경기 의정부시 한서중앙병원, 프랜차이즈로 잘 알려진 와플대학 등을 통해 일터에 기반한 사역도 담당하고 있다. ―많은 카페교회가 실패했다. “카페와 음식점 등의 외형을 지닌 일터교회들이 실패한 데는 여러 이유가 있지만 우선 수익을 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기 때문이다. 영세하기 때문에 신경을 안 쓸 수는 없지만 카페는 손해만 보지 않으면 된다. 중요한 것은 사람이다.” ―사람? “조금 낯이 익었다고 ‘예수 믿으세요’ 하면 되겠나? 이곳은 커피도 맛있고 직원의 서비스도 훌륭한데 알고 봤더니 예수 믿는 사람이더라, 이렇게 되어야 한다. 커피와교회의 힘은 직장을 일터선교지로 여기는 사역자들과 신자들에게서 나온다. 교회의 주인은 하나님이지 목사가 아니라는 확실한 선교관도 중요하다.” ―앞으로의 계획은 무엇인가. “커피와교회는 단순한 카페교회가 아닌 선교적 교회, 새로운 교회들의 개척자로서 100개의 교회 개척 및 개척 인큐베이팅을 위해 지금까지 달려왔다. 교회를 한 곳에 높이 세우는 것은 시대에 맞지 않는다. 커피와교회는 로컬 처치, 와플대학은 일터교회의 역할을 담당할 것이다.”김갑식 문화전문기자 dunanworld@donga.com}2022-06-27 03:00 
‘6·25때 육군병원’ 통도사, 현충시설 지정 기념 호국 위령재“6·25전쟁 중 뒤편 명부전에 부상병을 위한 교회가 있었다고 합니다. 불보사찰(佛寶寺刹·부처의 진신사리를 모신 사찰)인 통도사에 말이죠.” 경남 양산시 영축총림 통도사에서 18일 거행된 ‘현충시설 지정 기념 호국영령 위령재’에서 영축총림 방장이자 대한불교조계종 종정인 성파 스님(사진)은 법어를 통해 이렇게 말했다. 성파 스님은 준비된 원고가 아닌 즉석 법문에서 “저는 고향 합천에서 전투로 젊은 사람들이 희생되는 것을 목격했다”며 “우리나라에 이런 비극이 다시는 없도록 나라 정치를 잘하고 사람들이 힘을 모으는 게 위령재를 하는 의미”라고 덧붙였다. 통도사의 현충시설 지정은 주지 현문 스님을 중심으로 3년여에 걸친 노력 끝에 이뤄졌다. 6·25전쟁 중 많은 부상 군인이 통도사에 머물며 치료를 받았다는 증언이 있었지만 전쟁 뒤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졌다. “통도사와 이별한다” “停戰(정전)이 웬 말?” 등의 문구뿐 아니라 탱크와 트럭, 아이 얼굴 등 사찰과 어울리지 않는 대광명전 벽면의 그림들도 미스터리로 남아 있었다. 2019년 용화전 미륵불좌상 복장물(불상 봉안 시 넣는 물건)을 조사하다 6·25전쟁 때 통도사가 육군병원으로 쓰였다는 실마리가 나왔다. 통도사 주지를 지내며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을 돕기도 했던 구하 스님은 친필로 쓴 ‘미륵불좌상조성연기문’에 “1950년 6월 25일 사변 후 국군 상이병(傷痍兵) 3000여 명이 입사(入寺)해 1952년 4월 12일 퇴거했다”는 내용을 담았다. 지난해 1월 국방부는 통도사가 ‘제31 육군병원 통도사 분원’으로 사용됐음을 확인하는 내용을 통보했고, 국가보훈처는 그해 11월 통도사를 현충 시설물로 지정했다. 이날 위령재는 불교의식에 이어 현문 스님의 봉행사, 성파 스님의 법어, 조계종 총무부장 삼혜 스님이 대독한 총무원장 원행 스님의 추모사, 군악대와 합창단의 추모 공연 순으로 진행됐다. 현문 스님은 “긴 시간을 지나 제31 육군병원 통도사 분원의 역사가 온전히 드러났다”며 “통도사 사부대중의 원력을 모아 전쟁 중 산화한 무명의 용사를 위로하고, 이 땅에 희생의 아픔이 되풀이되지 않기를 발원한다”고 말했다. 이날 행사에는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 주호영 윤영석 국민의힘 의원, 민홍철 더불어민주당 의원, 이진복 대통령실 정무수석, 신범철 국방부 차관을 비롯해 스님과 불교 신도 등 1000여 명이 참석했다. 위령재에 앞서 연기문이 나온 용화전에서 ‘1000 미륵옥불 점안식’도 거행됐다.양산=김갑식 문화전문기자 dunanworld@donga.com}2022-06-20 03:00 [책의 향기]그림 속의 꽃, 더 생생하게 즐기기책의 첫 장은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꽃피운 거장 중 한 명인 보티첼리의 ‘프리마베라’가 문을 연다. 이 작품은 3m가 넘는 크기에 190개의 꽃이 등장하는데 130개는 실제 식별이 가능하다고 한다. 멕시코 화가 프리다 칼로의 ‘목련’은 꽃을 피우기 전의 상태로 묘사돼 있다. 그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목련은 칼로의 위태로웠던 삶과 죽음을 상징한다. 해바라기는 고흐나 고갱, 클림트 등 여러 거장의 작품 소재가 됐다. 책은 제목만큼이나 화려하다. 꽃이 피어 있는 책이다. 미술사학자인 저자가 매일 한 점씩 꽃 그림을 고른 뒤 흥미로운 미술사와 이야기를 입혔다. 2권으로 출간될 시리즈의 봄, 여름 편에 해당한다. 그는 자신의 미술관을 즐기는 방법으로 “그림을 가장 먼저, 그리고 찬찬히 보시기를 권한다”며 “그림 속에 담긴 꽃, 인물, 풍경 순으로 보라”고 했다. 그의 말대로 정말 꽃을 먼저 보면 익숙한 그림을 다르게 감상하는 새로움이 생긴다. 꽃의 종류를 중심으로 수선화, 목련 등이 등장하는 1부 ‘봄이 온다’와 백합, 양귀비, 해바라기 등이 나오는 2부 ‘여름휴가’로 구성됐다. 고흐, 모네, 조지아 오키프, 데이비드 호크니, 신사임당과 나혜석 등 여러 화가의 작품을 만날 수 있다. 그림마다 화가의 이름과 생몰 연도를 표기했다. 미술사적인 흐름을 짚으며 저자의 관점에서 작품을 해설해 에세이처럼 읽는 맛을 살렸다.김갑식 문화전문기자 dunanworld@donga.com}2022-06-18 03:00 
인연의 꼬리를 물고…부산서 ‘찐친’ 작가들이 모인 이유는10일 부산 연제구 혜원정사의 한 공간에서는 소설가 김연수 변왕중, 시인 문태준이 아이들의 손때 묻은 원고와 씨름하고 있었다. “야, 어떻게 이런 표현이 가능하지”라는 감탄사와 이들의 얼굴에 빙그레 웃음이 번지는 걸 보니, 즐거운 시간이기도 하다. 소설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밤은 노래한다’ ‘일곱 해의 마지막’의 김연수 작가는 이미 10여 년 전 문단의 내로라하는 상을 휩쓴 중견작가다. 재주 많은 편집자이자 시와 소설로 등단한 변 작가는 부인 박기린, 딸 다인 씨와 함께 활동하는 가족작가로도 알려져 있다. ‘가재미’ ‘그늘의 발달’ ‘맨발’의 문 시인은 가장 주목 받는 시인 중 한 명으로 최근 에세이 ‘나는 첫 문장을 기다렸다’를 출간했다.● 인연의 부산행문단의 중견작가들이 초중고생 대상의 백일장 심사를 위해 부산의 사찰에 모인 것은 꼬리에 꼬리를 문 인연 때문이다. 이 사찰 주지 원허 스님과 불교계의 대표적 문장가이자 심사위원장을 맡은 성전 스님은 출가 초기 해인사 강원(講院)을 함께 다닌 도반이다. 1997년 시작한 백일장 규모가 커지자 원허 스님은 “제대로 된 심사위원을 모시고 싶다”며 성전 스님을 졸랐다. 2007년 성전 스님에게 발목이 잡힌 이가 불교방송 PD로 불교 집안에서 한솥밥을 먹고 있던 문 시인이다. 이에 문 시인은 같은 경북 김천 출생의 중고교동창으로 40년 지기인 김 작가, 다시 포항 출신의 30년 지기 변 작가를 소환했다. 원고에서 잠시 눈을 뗀 이들은 세월과 사연을 더듬다 웃음을 터뜨렸다. “문태준이랑 김연수가 한 공간에서 심사하기는 쉽지 않죠.”(변 작가) “주지 스님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그리워 이렇게 모이는 거죠.”(문 시인) “한 사찰에서 30년 가깝게 백일장을 하는 것은 놀라운 일.”(김 작가) 원허 스님은 “순수한 감정을 제대로 표출하지 못해 나쁜 길로 빠지는 아이들이 있어 백일장을 시작하게 됐다”며 “사찰이 기도 뿐 아니라 글과 음악, 웃음이 가득한 문화도량 역할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올해 25회째를 맡은 혜원 백일장은 운문과 산문 부문을 합쳐 636편이 응모됐으며 지난 11일 시상식이 열렸다.● 해운대의 바닷가심사 뒤 해운대의 한 식당에서 다시 만난 세 작가는 여간해서 허점이 잡히지 않는 ‘찐친’이었다. 오랜 세월 알고 지내면 몇 차례 다툴 법도 한 데 그런 기억이 없다고 했다. 그래도 혹시라고 묻자 김 작가가 문 시인을 향해 “내가 먼저 등단해 삐졌을까?”라며 했다. 문 시인은 “뭐, 1년 먼저 등단했지만 너는 시가 안돼 소설로 갔잖아”라며 “저기 둘은 시와 소설 모두 등단한 2관왕인데, 나만 금메달이 하나”라며 웃었다. 이들은 “서로 코가 꿰여 시작한 심사이지만 이제는 이 무렵 부산행을 손꼽아 기다린다”고 말했다. 제주 불교방송 국장을 맡아 현지에 정착한 문 시인은 제주, 김 작가와 변 작가는 각각 경기 고양시와 강원 강릉시에서 부산으로 향한다. 변 작가는 “젊을 때는 약속하지 않아도 저녁 무렵이면 어느새 한 자리에 있었지만 지금은 어렵다”며 “그래서 내년, 내후년 부산행이 벌써 기다려진다”고 말했다. 심사도 글에 대한 평가에 앞서 배움이 있는 소중한 시간이라는 이들의 말이다. 김 작가는 “글로는 잘 다듬어지지 않았을 수는 있지만 읽다보면 울컥할 때가 많다”고, 문 시인은 “아이들의 시 자체가 때가 묻지 않은, 천진불(天眞佛)”이라고 했다.부산=김갑식 문화전문기자 dunanworld@donga.com}2022-06-12 11:50 
‘노래하는 포교사’→‘시인 스님’… “詩로 ‘내 안의 나’ 위로”충남 서산시 서광사에서 2일 만난 도신 스님(60)은 부처의 옆모습을 닮은 캐릭터를 그리고 글을 써주며 한 권의 시집을 건넸다. ‘노래하는 스님’으로 알려진 그가 올해 5월 출간한 첫 시집 ‘웃는 연습’이다. 그런데 저자의 이름은 도신이 아니라 8세 때 출가한 그의 속명(俗名) 박금성이다. 시집에 실린 시인의 말에는 이런 글이 있다. ‘날개 잃은 매미/앉아 울 수 있는/나무가 되어주신 당신께/목청 돋웁니다.’ ―매미와 나무는 누구인가. “매미는 나다. 나무는 부처님일 수도 있고, 내 이야기와 노래, 시를 들어주는 모든 분들이기도 하다.” ―요즘 노래는 부르지 않나. “1년에 한두 번 여는 산사음악회를 빼면 2012년 6집을 낸 뒤 무대에 서지 않는다. 나이가 있어 소리도 안 나오고, 노래는 아무래도 감정을 많이 넣어야 해서 부담스럽다.” ―시집에 속명과 비슷한 금자, 금순이라는 이름이 여러 번 나온다. “내 밑으로 금자, 마리아, 젖먹이였던 금순까지 세 여동생이 있었다. 살면서 계속 찾았지만 다시 볼 수 없었다.” 차를 따라 주던 그는 과거의 사연을 노래처럼 시처럼 이어갔다. 인천에 살다가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충남 예산군 수덕사와 인연을 맺었다. 그는 덕숭총림 2대 방장을 지낸 벽초 스님(1899∼1986)을 시봉했고 조계종 제31대 총무원장인 법장 스님(1941∼2005)을 은사로 모셨다. 1979년 ‘걸레 스님’을 자처하며 화가로 활동했던 중광 스님(1934∼2002)을 만나 그림을, ‘울고 싶어라’의 가수 이남이, 신중현에게 노래를 각각 배웠다. ―중광 스님과는 어떻게 만났나. “수덕사 매표소 밑에서 승복을 입은 채 ‘한 오백년’이나 나훈아, 조미미의 노래를 부르고 있던 시절이다. 중광 스님이 다가와 ‘은사가 누구냐? 노래 잘 부른다. 나랑 같이 가자’고 하더라. 이후 먹을 갈아드리며 10년 그림 수발을 했다. 이남이 선생이 중광 스님의 머리 기른 제자, 유발상좌여서 노래도 배웠다.” ―은사인 법장 스님이 흔쾌히 허락했나. “기타가 많이 부서졌다. 하라는 중노릇을 안 배우고, 용돈 주면 기타와 악보를 사고 뒷산에서 노래나 했으니…. 중광 스님과 인연이 있다고 생각하셨는지 결국 허락이 떨어졌다.” ―그때 그림과 노래 실력을 쌓은 건가. “그림은 ‘서당 개 3년 풍월’이라고 흉내만 내는 수준이다. 노래? 좋아하기도 했지만 노래를 통해 동생들과 어머니를 찾고 싶었는데 아무도 찾지 못했다. 노래도 그만두려고 했는데 듣는 분들이 좋아해 가사만 바꿔 노래하는 포교사 역할을 하려고 했다.” ―이제는 ‘시인 스님’이 됐다. “2018년 시인으로 등단했고 뒤늦게 중앙대 대학원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했다. 노래는 리듬 음정 강약뿐 아니라 감성에 묶여 있어 그게 힘들더라. 시는 좀 더 자유로운 편이다. 시를 쓰면서 어린 시절로 돌아가 보니, 내면에 원망과 눈물이 아직도 남아 있더라. 첫 시집을 내면서 ‘내 안의 박금성’을 많이 위로하며 치유하는 시간을 가졌다.” ―올해 3월 종단의 사법부 격인 초심 호계원장을 맡았다. “은사께서 열반한 뒤 조언해 주는 분이 없는 게 살면서 가장 아쉽더라. 당사자들도 납득하고 도움이 될 수 있는 그런 초심 호계원이 되도록 노력하고 있다.” ―앞으로의 계획은 무엇인가. “무엇을 하기보다는 안 하는, ‘쉬는 공부’를 배우려고 한다. 모든 인연과 생사 문제와 관련해 괴롭지 않은 내가 되기 위한 마음공부다.”서산=김갑식 문화전문기자 dunanworld@donga.com}2022-06-06 03:00 
“노래보다 자유로운 시…시를 쓰며 어린 시절 원망과 눈물 치유했죠”2일 충남 서산시 서광사에서 만난 도신 스님(60)은 부처의 옆모습을 닮은 캐릭터와 글을 써주며 한 권의 시집을 건넸다. ‘노래하는 스님’으로 알려진 그의 첫 시집 ‘웃는 연습’이다. 그런데 저자의 이름은 도신이 아니라 8세 때 출가한 그의 속명(俗名) 박금성이다. 시집에 실린 시인의 말에는 이런 글이 있다. ‘날개 잃은 매미/앉아 울 수 있는/나무가 되어주신 당신께/목청 돋웁니다.’ ―매미와 나무는 누구인가? “-매미는 나다. 나무는 부처님일 수도 있고, 내 이야기와 노래, 시를 들어주는 모든 분들이기도 하다.” ―요즘 노래는 부르지 않나. “1년 한두 번 여는 산사음악회를 빼면, 2012년 6집을 낸 뒤 무대에 서지 않는다. 나이가 있어 소리도 안 나오고, 노래는 아무래도 감정을 많이 넣어야 해서 부담스럽다.” ―시집에 속명과 비슷한 금자, 금순이라는 이름이 여러 번 나온다. “내 밑으로 금자, 마리아, 젖먹이였던 금순 세 여동생이 있었다. 살면서 계속 찾았지만 다시 볼 수 없었다.” 차를 따라주던 그는 과거의 사연을 노래처럼 시처럼 이어갔다. 인천에 살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충남 예산군 수덕사와 인연을 맺었다. 그는 덕숭총림 2대 방장을 지낸 벽초 스님(1899~1986)을 시봉했고 조계종 제31대 총무원장인 법장 스님(1941~2005)을 은사로 모셨다. 1979년 ‘걸레 스님’을 자처하며 화가로 활동했던 중광 스님(1934~2002)을 만나 그림을 , ‘울고 싶어라’의 가수 이남이, 신중현에게 노래를 배웠다. ―중광 스님과는 어떻게 만났나. “수덕사 매표소 밑에서 승복을 입은 채 ‘한 오백년’이나 나훈아 조미미의 노래를 부르고 있던 시절이다. 중광 스님이 다가와 ‘은사가 누구냐? 노래 잘 부른다. 나랑 같이 가자’고 하더라. 이후 먹을 갈아드리며 10년 그림 수발을 했다. 이남이 선생이 중광 스님의 머리 기른 제자, 유발상좌여서 노래도 배웠다.” ―은사인 법장 스님이 흔쾌히 허락했나. “기타 많이 부서졌다. 하라는 중노릇을 안 배우고, 용돈 주면 기타와 악보를 사고 뒷산에서 노래나 했으니…. 중광 스님과 인연이 있다고 생각하셨는지 허락이 떨어졌다.” ―그때 그림과 노래 실력을 쌓은 건가. “그림은 ‘서당개 3년 풍월’이라고 흉내만 내는 수준이다. 노래? 좋아하기도 했지만 노래를 통해 동생들과 엄마를 찾고 싶었는데 아무도 찾지 못했다. 노래도 그만 두려고 했는데 듣는 분들이 좋아해 가사만 바꿔 노래하는 포교사 역할을 하려고 했다.” ―이제는 ‘시인 스님’ 됐다. “2018년 시인으로 등단했고 뒤늦게 중앙대 대학원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했다. 노래는 리듬 음정 강약 뿐 아니라 감성에 묶여 있어 그게 힘들더라. 시는 좀 더 자유로운 편이다. 시를 쓰면서 어린 시절로 돌아가 보니, 내면에 원망과 눈물이 아직도 남아 있더라. 첫 시집을 내면서 ‘내 안의 박금성’을 많이 위로하며 치유하는 시간을 가졌다.” ―바둑도 아마 5단 수준이라던데…. “어릴 때 노스님들 곁에서 배웠다. 2010년 바둑 템플 스테이를 열어 인기를 끌었고, 김인 국수나 조훈현 유창혁 목진석 양상국 최정 사범 등과도 인연을 맺게 됐다.” ―지난 3월 종단의 사법부 격인 초심 호계원장을 맡았다. “은사 열반한 뒤 조언해 주는 분이 없는 게 살면서 가장 아쉽더라. 당사자들도 납득하고 도움이 될 수 있는 그런 초심 호계원이 되도록 노력하고 있다.” ―앞으로의 계획은? “무엇을 하기보다는 안하는, ‘쉬는 공부’를 배우려고 한다. 모든 인연과 생사(生死) 문제와 관련해 괴롭지 않은 내가 되기 위한 마음 심(心) 공부다.”서산=김갑식 문화전문기자 dunanworld@donga.com}2022-06-05 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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