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칼럼/전승훈]자살이 아니라 테러다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3월 3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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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승훈 파리 특파원
전승훈 파리 특파원
최근 그리스 출장을 갔을 때다. 아테네 공항에 비행기가 착륙하니 승객들이 안도의 박수를 쳤다. 돌아오는 길도 마찬가지였다. 프랑스 파리 드골공항에 내릴 때 박수가 터져 나왔다. 여기저기서 성호를 긋는 승객들도 보였다.

이러한 기내 풍경은 1980, 90년대 개발도상국 공항에 착륙할 때 흔한 장면이었는데, 요즘은 유럽 중심부에서도 펼쳐진다. 비행기 사고가 잇따르면서 승객의 불안감이 극도에 달한 듯하다. 특히 24일 독일 ‘저먼윙스’ 여객기 부조종사 안드레아스 루비츠(27)가 비행기를 프랑스 남부 알프스 산악지대에 고의로 추락시켜 150명이 사망한 사건은 끔찍한 ‘호러 영화’의 한 장면을 연상케 했다.

이번 사고로 세계 최고의 항공안전을 자랑해 왔던 독일인들은 망연자실하고 있다. ‘부조종사의 고의 추락’이 사고 원인이라는 프랑스 검찰의 발표에 대해 일부 독일 언론들은 처음엔 ‘에어버스의 기계적 결함을 막기 위한 희생양’이라며 음모론을 제기하기도 했다. 저먼윙스의 모기업인 루프트한자 측도 “사고 당시 루비츠는 비행에 100% 적합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조사 결과 루비츠는 오랫동안 우울증 치료를 받아왔고, 회사에 질병을 숨겨온 것으로 드러났다. 그는 사고 당일에도 병가를 위해 발급된 의료 진단서를 찢은 채 비행에 나선 것으로 밝혀졌다. 루프트한자는 항공기의 기계적 안전점검에는 세계 최고 수준의 시스템을 자랑해 왔지만, 정작 조종사 내면의 정신건강 관리에는 실패한 셈이다.

사건 직후 독일 정부는 “테러 조직과는 연관이 없다”고 주장했다. 유서도 없고 종교적 정치적 조직과의 연관성이 없다는 이유에서다. 그러나 조종석의 문을 걸어 잠그고 비행기를 알프스 산기슭에 시속 730km로 정면충돌하게 만들어 149명의 목숨을 앗아간 행위가 테러가 아니면 무엇일까. 그의 행위는 ‘자살 비행’이 아니라 ‘대량학살’이며, 여객기 ‘하이재킹(공중납치)’으로 불러야 한다. 프랑스 누리꾼들은 “루비츠가 만일 무슬림이었다면 당장 테러리스트로 규정했을 것”이라고 비아냥대고 있다.

그의 행동을 우울증 탓으로만 돌려서도 안 된다. 우울증은 전 세계 성인의 20%가 경험하는 질병일 뿐이며 폭력행위나 대량살인을 저지르게 하는 병이 아니다. 루비츠는 오히려 ‘사이코패스’에 가깝다.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지만 타인을 살해하는 데 아무런 죄의식도 없고, 오싹할 정도로 치밀하게 범죄를 준비한 냉혈한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문 밖에서 조종사가 미친 듯이 문을 두드리고, 승객들의 비명이 터져 나오고, 알프스의 거대한 모습이 시시각각 다가오는 마지막 순간까지 그의 숨소리가 한 번도 거칠어지지 않았다는 녹음기록이 이를 증명한다.

컴퓨터로 제어되는 기술이 발달하면서 비행기 사고에서 기체결함에 의한 사고는 5%가 채 되지 않는다고 한다. 점점 더 커지는 문제는 사람의 정신이다. 대한항공의 ‘땅콩회항’사건에서도 조현아 전 부사장이 분노 조절을 하지 못해 자의적으로 승객 안전을 위태롭게 하는 행동을 했다. 9·11테러 이후 모든 승객을 잠재적 테러리스트로 규정했는데, 이제는 모든 조종사가 비행기 공중납치 테러범이 될 수 있다는 의심을 해야 할 상황이다.

루비츠는 평소 역사에 자기의 이름을 남기길 원했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그의 행동은 전 세계 항공산업은 물론이고 현대사회가 존재할 수 있는 신뢰의 기반을 뿌리째 뒤흔들었다는 점에서 테러가 분명하다. 우리는 매시간 타인에게 내 목숨의 일부분을 맡기며 산다. 의사, 변호사, 택시운전사, 선장, 경찰, 군인, 정치인까지…. 나를 지켜줄 것이라고 믿었던 사람이 거꾸로 나를 공격해올 때의 공포보다 더 큰 공포는 없다.

전승훈 파리 특파원 rap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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