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나 바람이 들었을까. 모두들 기억하는 일 하나를 떠올려 보자. 법무부가 채동욱 전 검찰총장을 감찰하겠다고 하자 검사 한 사람이 사표를 집어던졌다. 차라리 ‘영웅 채동욱의 호위무사’가 되겠다며 말 그대로 집어던졌다.
부러움 반, 신기함 반. 그러나 냉정한 마음으로 다시 보자. 그 ‘사나이다움’의 정체는 무엇이었을까. ‘영웅’ ‘호위무사’ 어쩌고 하는 데서 보듯 인간적 감정과 사적 충성심을 앞세워 합법적이고 공적인 명령을 거부한 것이다. 비정의성(impersonality), 즉 사적 관계와 인간적 감정의 절제를 강조하는 공직사회에서는 용납할 수 없는, 또 용납되어서도 안 되는 일이었다.
문제는 이렇게 사적 관계와 사적 가치를 앞세우는 공직자가 적지 않다는 사실이다. 선후배 동료 커뮤니티로부터의 인정을 공적 가치보다 중시하고, 기업 등 고객집단과의 관계를 공적 목표보다 우선시하는 공직자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당연하지만 이러한 현상 뒤에는 이를 받쳐주는 나름의 시스템이 있다. 공직자들로 하여금 그렇게 행동하도록 유인하는 보상과 징벌의 체계이다. 공직사회와 기업을 비롯한 고객집단, 때로는 법무·회계법인과 정치권까지 삼각 사각으로 잘 연결되어 있다.
이러한 시스템의 중요한 부분 중 하나가 바로 재취업 구조. 이번 국정감사에서 보듯 일부 부처는 90% 이상의 퇴직자가 유관기업에 재취업했다. 퇴직 전후에 얼마나 많은 사적 가치들이 이 고리를 통해 오고 갔을지, 또 얼마나 많은 공적 가치와 목표들이 이에 희생이 되었을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이 잘못된 시스템을 어떻게 깰 것인가. 적지 않은 국회의원이 유관기업에의 재취업 제한을 강화하는 법안을 내놓았다. 어떤 형태로건 통과는 될 것 같다. 그러나 솔직히 희망은 걸지 않는다. 다시 무너질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도 법이 없어 이 모양이 된 것은 아니다. 재취업을 제한하는 법도 있고 이를 관장하는 기구도 있다. 이게 안 통하는 것은 잘못된 문화와 시스템을 유지하는 힘이 이를 해체하는 힘보다 강하기 때문이다. 이 불균형을 바로잡지 않는 한 문제는 계속될 수밖에 없다. 취업을 막으면 다른 수단을 찾을 것이고, 그것이 안 되면 또 다른 수단을 찾을 것이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권위주의의 해체와 5년 단임 체제의 정착, 여기에 정치권이 헤매는 사이 국가 목표는 불분명해졌고 공직, 특히 중간 이상 직위의 상대적 가치도 떨어졌다. 반면에 크게 성장한 시장과 시민사회는 막강한 힘과 자원으로 공직사회를 유인하고 있다. 힘의 불균형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이 힘의 불균형을 바로잡아야 할 일차적 책임은 정치권에 있다. 우리를 대표해 공직사회를 이끌어야 하는 책무를 지고 있기 때문이다. 대통령이든 정당이든 이러한 불균형을 바로잡아 공직자들을 공적 가치와 공적 목표에 더 단단히 묶어 둘 수 있는 방안을 찾아야 한다. 권위주의 문화를 복원하라는 이야기는 물론 아니다. 시대정신을 존중하면서도 강한 구심력을 갖는 그 무엇을 찾아야 한다. 이를테면 국민적 합의에 기초한 비전과 전략, 그리고 정의로운 가치와 도덕성 같은 것을 갖추는 일 등이다.
그러나 누구에게 뭘 기대할 수 있나. 한마디로 기대난망이다. 비전은커녕 하는 행동 하나하나가 오히려 병을 악화시킨다. 10월 보궐선거의 공천만 해도 그렇다. 국민이 다 아는 범죄행위를 한 사람을 공천한 정당도 있다. 조직의 이익을 위해서 그랬으니 괜찮다는 명분이다. 우르르 몰려가 그 인물됨을 침이 마르도록 칭찬도 했다. 조직 자체의 사적 이익이 공적 이익이나 공적 가치 위에 올라탄 것이다.
이러면서 공직자들의 사적 이익 추구를 비판하고 재취업 제한을 강화하는 법안을 낸다고? 공공기관 근로자들의 고용 세습을 두고 ‘이 자리가 당신들 소유물이냐’ 고함을 질러? 지나가던 소도 웃겠다.
결국 국민 스스로에게 희망을 걸 수밖에 없다. 어디서부터 시작할 것인가. 글쎄. 관심을 가지는 것부터가 시작이 아닐까. 또 공직에 대한 객관적 판단 기준을 가지기 위해 노력하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 될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지금 든 바람이 어디서 온 얼마나 무서운 병인지 알게 되지 않을까. 또 이것이 다시 적지 않은 변화를 불러오지 않을까. 정치권에, 그리고 공직사회 내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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