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109>보름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5월 27일 03시 00분


코멘트

황인숙 시인

보름
―장승리(1974∼)

설익은 감이 옥상 계단 위로 떨어진다
쿵, 쿵쿵 누가 누굴 때리는 소리 같다
자고 있던 강아지들이 벌떡 일어나
동시에 짖어댄다
썩은 과즙이 누렇게 변색된 감 주위를
달무리처럼 에워싸고 있다
어느 나무에서 떨어진 열매일까 저 달은
썩는 순간부터 눈부셔지는 달빛을 뭐라고
부르나요 당신은
자고 있던 사람도 벌떡 일어나
컹컹 짖게 만드는
그 옛날 끝없는 계단으로 떨어진
오늘 밤 저 달은
누가 누굴 계속 때리는 소리 같은데

옥상 계단에 감이 떨어진다니 단층집인가 보다. 아마 단독주택일 테다. 주위가 아주 조용할 때였을 것이다. 벽 너머에서 설익은 감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옥상 계단을 설익은 감이 굴러 떨어지는 ‘쿵, 쿵쿵’ 소리에 ‘자고 있던 강아지들이 벌떡 일어나/동시에 짖어댄다’. 뭣 모르고 짖어대던 강아지들은 이내 아무 생각 없이 다시 잠들었을 테다. 화자 혼자 바깥에 나가 본다. 강아지 한 마리쯤은 따라 나왔으려나. 화자의 짐작대로, 옥상으로 이어지는 계단 여기저기 감이 떨어져 있다. 어떤 감은 여러 날 전에 떨어져 ‘썩은 과즙이 누렇게 변색된 감 주위를/달무리처럼 에워싸고 있다’. 하늘엔 두둥실, 미끈히 무르익은 보름달. ‘어느 나무에서 떨어진 열매일까 저 달은.’ 여기부터 감은 달로 마술적 변화를 일으킨다. 어쩌면 화자를 밖으로 끌어낸 것은 감 떨어지는 소리가 아니라 달빛일지도 모른다. 설익은 채 떨어져 흠집이 난 감이 ‘그 옛날 끝없는 계단으로 떨어진/오늘 밤 저 달’로 교차하는 상념들. 보름날의 만월은 화자의 마음을 때린다. ‘자고 있던 사람도 벌떡 일어나/ 컹컹 짖게’ 만든다. 누군가와의 관계가 추락해 굴러 떨어지던 기억이 화자를 달무리처럼 에워싸고 있다. 달빛 아래서 으깨진 감을 내려다보던 화자는 옥상에 올라가 옛 기억을 더듬으며 한참을 서성거렸을 테다. 달이 너무 환해서!

감 하나 떨어진 거 갖고 이토록 섬세한 사유를 펼치누나. 시인이여!

황인숙 시인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