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108>길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5월 2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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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림(1908∼?)

나의 소년 시절은 은빛 바다가 엿보이는 그 긴 언덕 길을 어머니의 상여와 함께 꼬부라져 돌아갔다.
내 첫사랑도 그 길 위에서 조약돌처럼 집었다가 조약돌처럼 잃어버렸다.
그래서 나는 푸른 하늘빛에 호져 때 없이 그 길을 넘어 강가로 내려갔다가도 노을에 함뿍 자줏빛으로 젖어서 돌아오곤 했다.

그 강가에는 봄이, 여름이, 가을이, 겨울이 나의 나이와 함께 여러 번 댕겨갔다. 가마귀도 날아가고 두루미도 떠나간 다음에는 누런 모래둔과 그리고 어두운 내 마음이 남아서 몸서리쳤다. 그런 날은 항용 감기를 만나서 돌아와 앓았다.

할아버지도 언제 난지를 모른다는 마을 밖 그 늙은 버드나무 밑에서 나는 지금도 돌아오지 않는 어머니, 돌아오지 않는 계집애, 돌아오지 않는 이야기가 돌아올 것만 같아 멍하니 기다려 본다. 그러면 어느 새 어둠이 기어와서 내 뺨의 얼룩을 씻어준다.

    
    
강어귀의 그 마을, 아마도 화자의 고향이리라. 화자가 소년 시절에 ‘호져(혼자) 때 없이’ 헤매다 강가로 내려가곤 했던 ‘그 긴 언덕길’, 슬픔이 자욱이 깔린 상실의 길. 그 길에서 화자는 어머니의 상여가 꼬부라져 돌아가던, 영원히 잊지 못할 광경을 봤다. 그리고 그 길에서 데이트를 하며 풋사랑을 일구었던 대상을 바로 거기서 잃었다. 아름답고 슬프고 그리운 그 길은 실제 한 마을의 길인 동시에 ‘소년의 길’이다. ‘꼬부라져 돌아가다’란 말은 슬프다. 꼬부라져 돌아간 뒤에는 그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감수성 예민한 선병질 소년의 외롭고 여린 마음이 독자 가슴속 원초적 설움을 건드린다. 그 이미지가 선연히 떠오르는 시 속 풍경도 화자 개인의 기억이 아니라 인간 기억의 원형 같다. 전혀 흔하거나 진부하게 그려진 공간이 아님에도 친근하고 익숙하게 와 닿는다.

나무도 하필 늙은 버드나무일까. 이 시의 원형적 공간에 딱 어울리는 나무다. 청년이나 장년일 나이가 된 화자는 고향마을 어귀의 늙은 버드나무 밑에 서서, 깊은 그리움에 휩싸인다. 마을을 떠났던 자기처럼, 어머니도 계집애도 자기의 소년 시절도 돌아올 것만 같아. 아스라하고 아련했던 기억이 사무치게 되살아나 눈물짓는 화자를, 어둠 속에서, 어둠만큼이나 어두운 늙은 버드나무는 묵묵히 내려다봤으리라.

황인숙
#시#길#김기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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