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향의 달콤쌉싸름한 철학]힐링캠프와 청문회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9월 1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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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 이유가 있나요? 젊은 날, 맹목적 열정에 치여 평정심의 싹을 키우지 못했을 때 나는 홀린 듯 실존주의에 매료되었습니다. 특히 존재에는 이유가 없고, 생은 부조리한 거라는 카뮈의 철학은 나를 애늙은이로 만들었습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청춘이 지나가고, 맹렬했던 열정이 잦아든 자리에서 나는 그 이면을 보며 다른 고백을 합니다. 존재에는 이유가 있고, 인간은 등에 자신의 이야기를 지고 나온다고. 인간은 이야기들이 모이는 체험의 집 같습니다. 당신은 운명이라고 해도 좋을 당신의 이야기를 편안하게 되새김질해 본 적이 있습니까? 혹은 운명으로 얽힌 사람들의 이야기를 편안하게 들어주신 적이 있습니까? ‘힐링캠프’가 그 그림을 그려 보여 주지요?

힐링캠프의 힘이 있습니다. 생을 고백하게 만드는 힘! 미로 같은 인생에서 그 사람이 본 것을 듣고 있노라면 알지도 못하는 그 친구가 괜히 친하게 느껴집니다. 청문회가 권력에 의한 폭로와 자백의 질의응답이라면, 힐링캠프는 고백과 경청의 질의응답입니다. 형식은 모두 질의와 응답이고, 내용은 그 사람을 알자는 것인데, 저렇게 다를 수가 있을까요? 청문회를 통과하면 상처받지 않은 인간이 없고, 힐링캠프를 통과하면 빛나지 않은 인간이 별로 없습니다. 청문회에는 공격과 방어가 있고, 힐링캠프에는 던지고 받는 친밀함이 있습니다. 청문회에는 도덕성 검증이 있고, 힐링캠프에는 공감이 있습니다. 청문회에는 “존경하는 의원님들”이 있고, 힐링캠프에는 툭 쳐 주는 악동들이 있습니다. 청문회에는 비난하고 훈계하는 상대가 있지요? 그런데도 상대는 배우는 것 같지 않고, “존경하는 의원님”이라는, 아무도 쓰지 않는 존칭어를 써 가며 답변을 해도 웃기지 않는 개그 같을 뿐, 마음을 열고 자기 이야기를 토해 내는 것 같지 않으니 우리 생이 기대하는 것이 도덕이나 훈계의 청문회는 아닌 모양입니다. 누군가의 비난과 도덕적 훈계로 우리가 바뀌지 않듯 우리의 훈계로 바꿀 수 있는 것도 별로 없는 건 아닐는지요.

살면서 청문회를 즐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질문이 사랑이 아니라 걱정이 되고 비난이 되는 사람, 그런 사람 앞에서는 저절로 마음의 빗장이 닫히기 때문에 답변도 우물쭈물, 방어적으로 되지 않나요? 정직해지기 힘듭니다. 마음의 빗장이 열리지 않고서 마음의 이야기가 흘러나오는 법은 없습니다.

물론 공직자를 뽑기 위해서는 청문회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일상에서 필요한 것은 청문회가 아닌 힐링캠프입니다. 가까운 친구들과 종종 모닥불의 시간을 가져 보시지요. 그 과정은 칭찬도 비난도 없이 마음을 열고 들어주는 사람과의 교감이고, 그 궁극은 스스로와의 교감입니다.

사실 명치끝에 걸려 소화되지 않은 우리의 이야기는 나오지도 않고, 털어놓을 필요도 없습니다. 그저 몸살처럼 잘 앓고, 화두처럼 잘 품으면 됩니다. 따뜻한 마음은 그 사람이 대답하지 않는 걸 캐묻지 않습니다. 질문자는 판관 포청천이 아니며, 우리는 죄인이 아니니까요. 힐링캠프의 고수는 캐묻는 사람이 아니라 이야기가 흘러나올 수 있도록 편한 분위기를 만들어 주고 장단만 맞춰 주는 사람일 뿐입니다.

우리 인생의 힐링캠프는 친구의 이야기를 모두 알려 하는 것이 아니라 소화되지 못해 묶이고 끊어진 이야기들이 그 사람 안에서 자연스럽게 이어지고 흐를 수 있도록 그저 모닥불을 피워 주는 것입니다. 불빛에 힘입어 스스로 자신의 삶에 질문을 던지도록. 그리하여 그가 스스로 자신에게 귀 기울여 해답을 구하도록. 그렇게 얻은 자신의 이야기는 불빛 따라 자연스럽게 마음에서 마음으로 흐르게 되어 있습니다.

이주향 수원대 교수·철학
#이주향#달콤쌉싸름한 철학#힐링캠프#청문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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