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찻잔을 들며/고동주]진주조개의 아픔, 연단받는 인간의 아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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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3월 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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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동주 수필가
고동주 수필가
우연한 동기로 한산섬에 있는 해송진주양식장을 둘러보게 되었다. 사장의 안내로 진주 씨를 잉태시키는 시술실에 들어서니, 벽면의 ‘정숙’이라는 큰 글자가 분위기를 조용히 감싼다. 젊은 남녀 시술사 10명이 탁자를 앞에 두고 정성스레 조개 수술을 하고 있었다.

진주의 씨를 심을 조개는 3년생인데, 사람으로 치면 꽃다운 나이라고 한다. 건강한 조개는 생식소의 수술이 어려우므로 수술하기 5개월 전부터 일부러 죽지 않을 정도의 햇볕 충격을 주어서 허약한 체질로 만든다. 기진맥진한 조개의 생식소 벽을 가르고 진주 핵이라는 둥글게 다듬은 이물질을 집어넣는다. 이것이 진주조개의 아픔의 시작이다.

수술을 마친 조개는 임신부를 다루듯 보름 동안 요양을 시킨 후 채롱에 넣어 바다 뗏목에 매단다. 수술 자국이 아물고 나면 조개는 자궁 안에 들어온 이물질인 핵과 또 싸워야 한다. 어둡고 아프고 고통스러운 비탄 속에서 몸부림할 때마다 이상 분비물이 생기고 그 분비물이 핵을 서서히 둘러싸면 엷은 진주층이 한 겹씩 쌓인다. 밤하늘의 달과 심해의 어둠이 만들어 낸 역설의 광채. 그래서 진주는 인어의 눈물방울이라 했던가. 이런 시련을 2년여 견디는 동안 그 밑에 달려 있는 수많은 진주조개의 아픔이 얼마나 크겠는가 싶었다.

진주 양식을 하는 바다는 깨끗하고 잔잔하면서 영양이 풍부하고 계절에 관계없이 늘 푸른 산그늘이 드리운 곳이라야 한다. 거센 파도가 몰아치거나 지나다니는 배의 엔진 소리라도 나면 놀라서 분비물이 잠시 멎게 되므로 진주의 면이 고르지 못하고 좋은 색깔이 나지 않는다. 보살피는 정성이 조금만 모자라도 귀찮은 기생물이 잡초처럼 돋아나고 해적 생물까지 붙어서 아픈 조개를 더 괴롭힌다. 바다 밑에서도 완전히 평온한 영역은 없는 것 같다.

이렇듯 한 알의 신비로운 진주를 탄생시키려면 아이를 키우듯 애정과 정성을 다 쏟아도 모자란다. 이런 조건을 다 이겨야 결이 없이 매끈하고 고운 진주가 생겨난다. 색깔도 백색, 은백색, 황색 등 다양하지만 핑크빛에 가까울수록 좋고, 그것도 바다빛이 안개처럼 은은하게 섞이면 최상품(最上品)이라는 말을 들었다.

최상품의 진주가 되기 위한 아픔도 이러한데, 최고의 인간이 되기 위한 아픔이야 오죽하랴 싶다. 닥치는 시련을 단련의 기회로 삼아 야무지게 수용하고 다듬는 용기 앞에 인품은 빛이 나는 법. 그 강도(强度)가 강하면 강할수록 신비로운 보석처럼 되는 것이 순리라는 생각에 이른다.

배를 타고 돌아오면서 내가 살아가는 인생의 모습을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고통스러우면 적당히 비켜서는 등 안일하고 게으르기만 했던 것이다. 지금부터라도 내 마음속에 진주가 되는 씨 하나를 소중히 묻어두고 싶다. 그리하여 진주층이 눈물처럼 쌓일 때마다 아픔을 배우고 그런 아픔을 이겨내는 진주조개처럼 살면서 신비로운 진주빛 글이라도 남기고 싶다.

그런데 나는 아직도 정성의 샘이 너무 얕고 작은 아픔도 참을 수 없으니 그 진주빛 소원은 너무 지나친 욕심이 아닐까.

고동주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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