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찻잔을 들며/지연희]꽃비 내릴 봄날이 저만치 오고 있다

  • Array
  • 입력 2012년 3월 15일 03시 00분


코멘트
지연희 수필가·시인
지연희 수필가·시인
가만히 귀를 기울여 보면 메마른 땅속 저 깊이에서 숨죽여 생명의 박동을 키우는 씨앗들의 꿈틀거림이 들리는 듯하다. 감은 눈꺼풀 속으로 스며드는 파릇한 꽃의 근원들이 흙을 비집고 일제히 숨을 돋으며 세상 속으로 고개를 들고 있다. 며칠 전 경칩이 지나고 머지않아 춘분이 다가오고 있지만 성급한 내 마음속 계절 하나가 쉬이 다가서지 못하는 꽃 소식을 부르는 모양이다.

온갖 생명의 힘을 돋아 올리는 봄이면 세상은 새 생명의 숨소리로 가득하다. 산과 들, 도심의 어느 뒷골목 조각난 시멘트 틈 사이까지 생명을 심는 계절의 안간힘은 경이롭지 않을 수 없다. 빗금 하나로 열린 시멘트 틈 사이로 가느다란 풀 한 포기가 생명의 순을 뻗어내는가 싶더니 밥풀보다 작은 크기의 꽃송이를 물고 골목길 길손을 맞이하고 있던 봄을 기다린다.

봄으로 일어서는 생명은 암흑의 절망과도 같은 동토의 계절 하나를 딛고 햇살을 향해 키를 키우는 알몸의 노숙자인지 모른다. 오래 묵은 폐가의 굴뚝에 이는 연기처럼 제 몸에 도는 피돌기 하나로 불씨를 붙여 조금씩 조금씩 마당 한쪽 샘물을 퍼 올리는 마중물인지 모른다. 옥상 한쪽 등나무의 뿌리를 담고 있는 화단의 흙더미 속에서 앙상한 줄기로 팽팽히 물을 올리는 나뭇가지 하나가 심상치 않다.

앞마당 목련나무는 지난해 12월 폭설의 한파 속에서도 기어이 꽃봉오리를 머금기 시작했다. 삭풍이 불어올 때마다 몸을 움츠리면서도 내려놓지 못한 갈망이 머지않아 피어나려 한다. 꽃은 나무가 기도하는 초탈의 이상(理想)이며 가장 아름다운 삶의 근원이고 향기이다. 생명으로 시작한 나무의 성급한 꽃 피우기를 바라보면서부터 어쩌면 나도 봄날을 그리워했는지 모른다. 순백의 목련꽃을.

흙은 어머니의 태반처럼 생명을 짓는 집이다. 소복소복 돋아날 쑥이며 냉이, 명아주, 씀바귀, 이름 없는 풀꽃들이 포기를 늘리며 아기 눈망울 같은 반짝이는 생명을 키워낼 봄을 기다린다. 머지않은 봄, 햇살은 또 얼마나 어머니의 자애로운 손길로 생명의 숨을 쓰다듬어 다독일지. 봄 햇살 찬란히 내려앉은 흙에서는 어머니의 목련꽃 향기 같은 젖내가 솟아나는 듯하다.

생명의 다양한 종류만큼 수많은 탯줄을 연결하는 봄날의 대지에는 만삭의 어머니들이 분만을 기다리고 있다. 맑은 순수가 훼손된 나른한 세상에 싱그럽고 찬연한 별빛 같은 새 생명의 눈동자를 탄생시키려 한다. 연하디 연한 살결로 미소 짓는 순수, 어느 쪽이 동쪽인지 어느 쪽이 서쪽인지 분별이 쉽지 않은 세상에 한바탕 꽃비를 뿌려줄 봄날이 곧 오려고 한다.

지연희 수필가·시인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