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찻잔을 들며/간복균]어지러운 세상… 난향에 묻혀 먼 산을 바라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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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2월 1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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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복균 수필가·루터대 석좌교수
간복균 수필가·루터대 석좌교수
입춘이 지났다. 바야흐로 난초의 향기가 한창인 계절이다.

내게는 30여 분(盆)의 난초가 있다. 1년 내내 소일 삼아 기르면서 섣달부터 이제나 저제나 기다리던 난들이 입춘이 지나면서부터 앞다투어 연초록 꽃대를 밀어 올리더니 이제는 만개해 온 집안이 난향으로 가득하다.

입춘대길(立春大吉). 그래! 세상도 난향처럼 염원대로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다. 그러나 세상은 평탄치 못할 조짐이다.

내가 난초를 좋아하게 된 것은 우연한 일이다. 난분 옆을 지나다 실수로 건드렸는데 엎어져 팍삭 깨져버렸다. 평소에 겉으로 보이지 않던 희고 굵은 뿌리가 얽히고설켜 화분을 찍어 놓은 것 같은 모양을 하고 있었다. 언제 물을 주었는지조차 생각나지 않는 난초는 비록 흙은 말랐어도 뿌리는 싱싱했다. 강한 생명력과 굳은 의지 같은 것에서 옛 선비들의 지조를 느낄 수 있었다.

근심 없이 유선형으로 쭉 뻗은 난잎을 보라. 면도칼날 같이 날카로우나 거기에는 휘어져 운치가 있고 여유가 있다. 구부러지거나 비틀어짐이 없이 바르고 곧을 뿐이다. 다른 식물처럼 곁가지를 치는 일이 없고 오직 하나의 뿌리에서만 새싹이 나서 날렵한 자태를 뽐낸다. 휘어진 잎에서는 항상 꿋꿋하고 날카로운 기상을 풍긴다. 날카로우나 그 끝은 쳐듦이 없고 끝은 땅을 향하여 겸손을 나타내고 유선형을 아래로 이루는 잎들은 여유의 상징이다.

늘 가지런하고 정연한 자태는 선비의 몸가짐 같다. 뿌리와 잎은 먹을 것조차 탐하지 아니하고 영화를 그리워하지 않는다. 그저 소박하리만치 척박하고 깨끗한 석벽 흙이나 바위틈에 뿌리를 내리고 걸쭉한 영양소를 탐하지 않고 오직 섭취하는 것은 청옥처럼 맑은 물뿐이다. 한번 뿌리를 적시면 물조차 탐식하지 않고 열흘이고 스무 날이고 먹지 않고 사는 신선 같은 청빈하고 고고한 삶 그 자체다. 손가락 마디처럼 굵고 굳센 흰 뿌리는 지조의 상징이며 온갖 고통과 시련에도 견딜 수 있는 굳건한 인내와 정신력의 상징이다. 난초 잎은 영롱한 이슬을 받아먹을 뿐 사시사철 변함없이 푸르고 싱싱하다. 나무처럼 탐욕스럽게 크거나 무성하지도 않고 여느 풀이나 꽃처럼 헤프고 천하게 어우러지는 일이 없다. 또한 난초의 극치인 난꽃은 어떠한가. 잎들이 사방으로 겹겹이 에워싼 한 촉 속잎에서 연초록빛의 싹이 촛대처럼 솟아나와 꽃을 피운다.

보기에도 앙증스러운 꽃. 함박꽃처럼 훤하리만치 탐스럽지도 않고 부귀영화를 탐하지도 않는다. 장미처럼 찬란한 색깔을 뽐내며 가시 돋친 천박한 여인의 육체처럼 보는 이를 유혹하지도 않고, 철없는 처녀의 향수처럼 헤프리만치 짙은 향기를 뿜어내는 라일락 같지도 않다. 난꽃은 작으면서 아기자기한 맛이 있고 비록 꽃은 작으나 은은하게 멀리까지 풍기는 난의 향기는 동양 규수의 멋이다.

꽃은 희되 꽃받침은 연초록이어서 고아하고 고상한 자태는 보고 또 보아도 싫증이 나지 않고 은은한 매력이 있어 그 아름다움의 진가를 알아보기에 어렵지 않다. 피기가 어려워서 그렇지 한번 피기 시작한 꽃은 일시적 영화에서 벗어나 달포가 넘도록 꽃을 피우지만 싫증나지 않는 영원의 미를 다소곳이 풍기며 우리를 은밀히 유혹한다.

지조 굳고 검소하며 바른 삶 옳은 삶으로 신의와 절개를 지키면서도 풍월을 즐기던 우리 선조들이 왜 난을 좋아했는지 이제야 짐작이 간다. 요즘 세상이 어지럽다. 옛 선비처럼 이 계절에 난꽃을 바라보며 여유와 한가를 가져보면 어떨까. 난향에 묻혀 먼 산을 바라보며….

간복균 수필가·루터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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