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찻잔을 들며/김애양]조선족 여인의 참을성은 어디에서 나오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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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2월 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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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애양 수필가·은혜산부인과 원장
김애양 수필가·은혜산부인과 원장
산부인과 진찰대에 누운 환자가 발버둥을 치기 시작한다. “마취해 주세요, 마취.”

5년 전에 끼운 피임기구인 루프를 제거하는 순간이다. 그녀가 착용한 루프는 T자 모양에다 꼬리처럼 실이 매달려 있기 때문에 그 줄만 잡아당기면 된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체질상 아픈 것은 조금도 참을 수 없다며 마취를 해달라고 수선을 피운다. 하도 요란하게 소리를 지르니까 밖에 있던 간호사까지 달려와 진정을 시켜 봐도 막무가내다. 그간 여러 차례 성형수술을 통해 수면마취를 받아 보았더니 하나도 아프지 않아 좋았다며 환자가 원하는데 왜 마취를 안 하는 거냐고 볼멘소리를 한다. 나로선 루프 제거 시술이 워낙 쉽고 삽시간에 이뤄지는 것이라 마취란 터무니없게만 들린다. 그러나 결사적으로 버둥거리며 협조를 하지 않는 통에 결국 그녀에게 지고 만다.

비단 이 환자만 그러는 게 아니다. 참아보려는 일말의 노력도 없이 편한 것만 원하는 환자가 점점 많아지고 있다. 루프를 끼울 때도, 뺄 때도, 작은 종기 하나 째려 해도 다짜고짜 수면마취를 해달라는 사람 일색이다. 환자들은 몸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에 공포심으로 떨기 마련이니까 찬찬히 설명해 줘도 반응은 마찬가지다. 돈은 얼마든지 낼 테니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도록 푹 재워 달라고 조른다. 어쩌면 고통의 상징인 진통조차 무통분만으로 해결한 현대 의학발전의 결과인지도 모른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잘 참는 이들이 따로 있다. 중국에서 한국으로 일하러 온 조선족의 경우 의사를 감탄시킬 만한 인내심을 보여주곤 한다. 중국 루프는 금가락지 모양의 용수철인데 환(環)이라고 부른다. 거기엔 꼬리가 달려 있지 않다. 한 번 끼우면 영구적으로 쓰기에 뺄 때의 수고는 고려하지 않은 것이리라. 그렇다 보니 환을 제거하기란 마치 호리병 안 옥구슬을 꺼내는 일처럼 간단치가 않다. 그래서 조선족 환자만 보면 환을 빼러 온 걸까봐 나도 모르게 긴장하게 된다. 기구로 환을 잡으려면 먼저 자궁 입구를 열어야 하는데 그 순간 환자가 느끼는 아픔은 가히 산고에 비할 만큼 고통스럽다. 어쩌면 통증으로 인한 쇼크를 일으킬 수 있는 상황이므로 환자에게 마취를 선택할 수 있다고 알려준다.

그때마다 그들은 “일 없습네다. 몽혼주사(夢魂注射) 없이도 참을 수 있습네다”라고 시원스레 답하곤 한다. 실제로 마취를 하고 환을 제거한 조선족 환자는 한 명도 없었다. 몇 분 동안에 걸친 진땀 나는 시술 끝에 드디어 환을 꺼내고 나면 그네들이 잡고 있던 진찰대 손잡이에 흥건히 고인 땀을 볼 수 있다. 여태 신음소리 한 번 내지 않았건만.

이런 참을성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오직 어렵고 힘든 처지에서만 인내심이 발휘되는 걸까? 단군신화에서 100일간 쑥과 마늘만 먹고 견딘 곰 이야기를 보면 우리야말로 인내심을 타고난 민족 아니던가? 밭에서 일하다 아이를 낳고도 마저 마무리를 지었다던 우리 어머니 세대의 삶은 인동초와 같다지 않던가? 오랜 세월 우리는 은근과 끈기를 자부하고 살았는데 요즘 진료실 풍경을 보면 그런 미덕이 어디로 사라지는지 궁금하다. 나야말로 덥다고 에어컨 온도를 와락 낮추고, 춥다고 히터 조절기를 훅훅 올리고 있으니 말이다.

김애양 수필가·은혜산부인과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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