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고미석]“잘 들어줬을 뿐인데요”

  • 동아일보

스위스의 유명 작가가 지적장애인을 위해 책을 낭독해 달라는 요청을 받는다. 처음엔 글을 쉽게 다듬을까 망설이던 작가는 문화적 소양을 가진 청중 앞에서 하던 것과 똑같은 내용을 낭독한다. 그리고 놀라운 교훈을 얻는다.

“나는 그들보다 더 집중해서 듣는 청중을 만난 적이 없다. 그들은 정말 귀를 기울였다. 어찌나 경청하는지 낭독하는 내가 그들의 ‘듣기’를 몸으로 느낄 정도였다. 나는 예정보다 오래 읽었고, 읽는 것이 즐거웠고, 내 이야기들을 다시 좋아하게 되었다.”

한인 美 정신과 의사의 성공 비결

페터 비히셀의 산문집에 실린 ‘이해하기보다 듣기’에 나오는 얘기다. 이 특별한 청중의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일을 ‘이해’라는 말로 표현하기는 어려울지 몰라도 자신은 그들에게 이해를 받는다는 느낌이 들었다고 털어놓는다. 그들이야말로 그가 만난 가장 능동적 청중이었다.

이 ‘성급하게 이해하지 않는 훌륭한 청중’을 예찬하는 글을 보면 한 신경정신과 의사에게서 들은 일화가 생각난다. 환자는 뒤엉킨 실타래 같은 고민을 실컷 쏟아 붓고 나더니 농담처럼 투덜댄다. “아니, 선생님은 가만있고 얘기는 내가 다 했는데 왜 돈을 내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심리전문가가 아니라도 살면서 뼈저리게 체득하는 지혜가 있다. 내 말을 진지하게 들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그 자체가 위로라는 사실.

물론 타인의 말을 집중해 듣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미국에서 일한 어느 한국인 정신과 의사의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다. 그는 미국인 환자들 사이에 용한 선생님으로 명성이 높았다. 인기 비결이 뭐냐니까 “영어가 모국어도 아니고 말이 유창하지 못해 환자 말을 한마디라도 놓칠세라 열심히 들어주었을 뿐”이라고 대답했다 한다.

직업이 아니라도 상대의 말을 잘 들어주는 것은 인간의 미덕이다. 또한 개인이든 집단이든 갈등을 푸는 첫 단추이자 소통의 시작이다. 트위터 등 세상을 뒤바꾸는 디지털 미디어의 성공비결도 결국 “누군가 내 얘기 좀 들어 달라”는 간절한 속내를 기술의 도움을 받아 현실화한 것 아닌지. 그 핵심에 쌍방향 소통방식이 자리한다는 점도 의미심장하다.

선거를 앞두고 이런저런 토론이 봇물을 이루고 이슈가 생길 때면 공청회가 열리지만 토론모습을 보면 한국 사회는 아직 모놀로그의 사회임을 알 수 있다. 어떤 주제든 토론자들은 “들으나마나 그 소리야” 하는 표정으로 상대 말을 경청하기보다 내 얘기만 일방통행으로 쏟아내느라 바쁘다. 백날 해봐야 차이를 인정하며 공감대를 넓혀갈 여지는 없다. 다시 페터 비히셀의 얘기를 곱씹어 본다.

“어쩌면 ‘듣기’란 ‘이해하기’보다 훨씬 높은 단계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결국 대단찮은 청중일 것이다. 언제나 성급하게 이해하려고 하니까.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우리는 진정으로 들을 수 있다.”

사회도 소통의 시작은 경청

일상이나 나랏일이나 우리를 갈라놓는 문제에 대한 접근법도 여기에 대입해봄 직하다. 듣지 않고도 상대가 하려는 얘기를 이미 안다고 단정 짓거나, 들어도 무턱대고 조급히 이해하려 들지 말기. 그저 원점으로 돌아가 차근차근 서로의 얘기를 풀어내고 서로의 말을 끝까지 귀담아 들어주는 시간을 갖는 것이 소통의 첫걸음이다.

가만. 그러고 보니 귀 기울여 듣지 않으면 놓치기 십상인 게 또 있다. 비포장도로를 달리듯 덜커덩거리며 찾아왔던 올봄이 어느새 살금살금 지나가는 소리.

‘이게 아닌데/이게 아닌데/사는 게 이게 아닌데/이러는 동안/어느새 봄이 와서 꽃은 피어나고/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그러는 동안 봄이 가며/꽃이 집니다/그러면서,/그러면서 사람들은 살았다지요/그랬다지요’(김용택의 ‘그랬다지요’)

고미석 전문기자 mskoh11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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