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칼럼/김영진]한국영화, 위기일수록 모험심을

  • 입력 2009년 1월 17일 02시 58분


요즘 흥행하는 영화 ‘쌍화점’의 유하 감독은 언론 시사회에서 이런 말을 했다. “한국영화가 어려운 시기에 이 작품이 물꼬를 터줄 수 있을까 부담이 큽니다.” 한 편의 영화로 산업의 판도가 바뀌지는 않겠지만 이것도 한국적인 풍경이라고 생각한다. 한두 편의 영화 흥행 여부에 민감할 만큼 산업 규모가 작고 반전의 여지가 많기 때문이다. 필자의 기억으로 영화판 구석에 기웃거리기 시작한 1990년대 이후 언론에서 가장 많이 들었던 단어가 한국영화 위기설이었다.

흥행작품 공식 베끼기 이제 그만

1970년대부터 장기 불황의 늪에 빠졌던 한국영화계는 1988년 서울올림픽 이후 영화 콘텐츠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높아지면서 영화사 사장이 자기 돈으로 작품을 제작하는 수공업적 단계를 벗어나 대기업으로부터 투자받아 영화를 만드는 산업이 됐다. 이 산업의 논리는 10억 원을 들여 5억 원의 수익을 남기느니 깨지더라도 50억 원을 들여 만드는 게 산업의 파이를 키우기엔 좋다는 길을 따랐다. 2000년대에는 특히 1000만 관객을 두 차례나 동원하는, 광복 이후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면서 너도나도 대작급 마케팅 전략에 전력투구했다. 부가판권 시장이 궤멸된 상태에서 극장 흥행으로 200만 명을 넘기지 않으면 대개 본전에 못 미친다. 이런 시장이 잘된다는 게 오히려 이상하다.

영화인은 다양한 작품을 만들어 시장에서 생존하는 길 말고 기형적인 이 시장에서 자기만 살아남는 방법을 택했다. 설령 극장에서 흥행에 성공하지 못하더라도 DVD를 비롯한 2차 시장에서 수익을 내는 해외시장과는 별개로 한국에선 영화 콘텐츠가 지독하게 극장 중심적이며 불법 다운로드 시장과 경쟁하기 위해 극장 개봉이 끝나기 무섭게 영화가 2차 시장으로 직행한다. 어디서든 영화를 볼 수 있으니 영화라는 상품의 부가가치가 떨어진다. 단발을 노리고 제작된 영화이니 질도 떨어진다. 지금 상영된 영화가 10년, 20년 후에도 스테디셀러로 남을 게 몇이나 될지 궁금하다.

관객은 바보가 아니다. 성공한 영화의 공식을 재탕해 우려먹는 방법은 언뜻 안전해보이지만 가장 무식한 투자임을 지난 몇 년간의 끔찍한 작품목록이 입증해준다. 2000년대 이후 성공한 일부 영화의 사례는 거꾸로다. ‘공동경비구역 JSA, 친구, 살인의 추억, 올드보이, 실미도, 추적자’는 흥행이 쉽지 않을 것이라고 전망한 영화였다.

영화가 돈이 된다는 환상이 유포되고 투자자가 몰린 가운데 제작사가 상장 기업이 되는 사례가 만들어지면서 한국영화계는 유명 배우를 캐스팅해 성공한 영화의 장르 공식을 베끼면 안전하게 투자받을 수 있다는 매너리즘에 빠졌다. 어중이떠중이 다 배우를 끼고 제작에 나선 가운데 대다수 영화가 극장에서 잔인하게 버려졌다. 이런 상황에서 중요한 점은 자신의 프로페셔널리즘을 증명할 수 있는 영화인의 창의력과 모험심이다.

필자는 최근 성공한 쌍화점과 과속스캔들이 썩 잘 만든 영화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 영화들은 관객의 정서구조와 접속할 만한 어떤 힘을 갖고 있다. 관객 취향을 조사하고, 수많은 테스트 시사를 하고, 기왕에 성공한 영화의 플롯과 스타일을 복제한다고 해서 되지 않는다.

쌍화점은 유하라는 걸출한 스토리텔러가 고려시대 개혁 군주의 사례에서 파괴적인 에로스를 뽑아낸 독특한 관점으로부터 폭발력이 생긴 영화다. 과속스캔들은 전형적인 코미디 공식을 갖고도 기왕의 조폭 코미디가 낭비했던 난센스 슬랩스틱의 요소를 철저히 배제하면서 유머 코드를 배열한 감독의 재치로부터 공감을 얻어내는 영화다. 절대적인 모범답안은 아니겠지만 감독의 개성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증명하는 사례는 될 것이다. 아마도 또 다른 멍청이들이 이 성공 사례를 답습하려 할 것이다.

‘쌍화점’과 ‘과속스캔들’의 개성

한국영화계는 재능 있는 감독이 많이 대기하고 있는 미완의 터전이라고 생각한다. 문제는 이 재능을 합리적으로 조련할 브랜드 있는 제작사가 잘 떠오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진정한 한국영화의 위기는 이것이다. 한때 사이더스나 명필름이 갖고 있던 제작사의 브랜드 파워, 박찬욱이나 봉준호의 뒤를 잇는 감독의 파워, 이런 것이 회복되지 않으면 한국영화계의 위기는 예상보다 더 길어질 것이다. 개성과 창의력은 배짱 없이는 보증되지 않는다. 나는 한국영화계가 모험심을 잃어버리지 않을까 늘 걱정한다.

김영진 영화평론가 명지대 영화뮤지컬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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