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윤평중]시장은 악마가 아니다

  • 입력 2008년 11월 5일 03시 01분


세계를 강타한 금융위기가 전 지구적 경제침체로 이어지고 있다. 세계화의 파고 앞에 그대로 노출된 우리 사회의 위기체감지수는 더 높다. 불황의 그림자가 곳곳에 드리우고 기업은 비명을 내지른다. 수많은 경제주체가 못살겠다 아우성이고 사회적 약자들은 한계상황으로 내몰리고 있다.

오늘의 금융위기는 ‘시장의 실패’를 극적인 방식으로 보여준다. 현란한 수학공식으로 포장한 금융 파생상품의 거품이 꺼진 자리는 폐허로 남았다. 한탕 챙기고 발을 뺀 월가의 극소수 금융 최고경영자(CEO)와 자본가의 웃음과 집 뺏기고 직장 잃은 대다수 노동자의 통곡이 극명하게 대비되는 상황은 카지노자본주의의 비도덕성과 허구성을 웅변한다.

이제 신자유주의는 공공의 적이 되고 말았다. 투기를 부추기고 극단적 양극화를 낳았다는 이유에서다. 그 결과 사회적 통합성이 파괴되고 삶은 갈수록 팍팍해지는 것으로 그려진다. ‘작은 정부, 큰 시장’을 내세운 신자유주의가 결국 자본가의 천국이자 노동자의 지옥으로 귀결되었다는 것이다. 자본주의의 모순을 고발한 19세기 사상가 마르크스가 21세기에 재조명되는 것은 이런 맥락에서다.

공공성의 영역인 교육, 의료, 환경, 복지조차 자본의 논리에 종속될 때 인간적인 것이 설 자리는 그만큼 좁아진다. 시민적 양식으로부터 멀어진 시장이 국가의 조절 기능조차 무력화(無力化)시킬 때 시장은 난장(亂場)이 된다. 벌거벗은 욕망이 질주하는 시장은 모든 걸 삼키는 공룡이 되고 만다. 효용성과 돈이 모든 것을 지배하는 ‘시장전체주의’ 시대가 도래하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시장은 악마가 된다.

실패론은 성급하고 부정확

그러나 한국의 진보가 선호하는 이런 종류의 시장 비판은 일면적이며 편향적이다. 획기적인 미국 정치의 리더십 교체가 상징하듯 모든 지나친 것은 반작용을 불러온다. 네오콘이 주창한 약육강식의 신자유주의 시장론은 시장의 한 측면만을 기형적으로 왜곡한 것이다. 지금의 경제위기는 왜곡된 시장이 스스로를 수정해가는 진통일 수도 있다. 금융위기를 빌미로 확산되어가는 시장 실패론은 성급할 뿐만 아니라 정확하지도 않은 진단인 것이다. 자유시장의 역사는 실패를 거울삼아 부단히 진화해 온 역사이기 때문이다.

반(反)시장, 반경쟁 논리에 기울어져 있는 한국 진보는 시장의 이런 역동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은 신자유주의의 한국화를 추진하는 이명박 정부에 반동적 파시즘의 혐의까지 씌우면서 북유럽 사민주의 모델인 ‘큰 정부, 작은 시장’에 대한 향수를 버리지 않는다. 그러나 한국은 유럽이 아니다.

여기서 우리는 ‘큰 정부, 작은 시장’ 대(對) ‘큰 시장, 작은 정부’의 단순 이분법을 넘어서야 한다. 한국형 압축성장 자체가 ‘큰 정부, 작은 시장’의 구도에서 출발해 ‘큰 정부, 큰 시장’으로 발전해 왔기 때문이다. 이는 우리가 시장의 자율성이라는 신화에 집착할 이유가 없다는 걸 시사한다. 자본주의 역사는 근대 시장이 자체적으로 형성되지 않았고 국가의 적극적 개입에 의해 발전해왔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문제의 핵심은 시장과 정부의 크고 작음이 아니라, 그것들이 제대로 작동하느냐 여부인 것이다.

21세기 금융자본주의의 위기는 신자유주의적 시장의 일탈에 정부가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결과다. 국내 시장의 혼란이 한국 정부의 무능과 무정견 때문에 심각하게 증폭되는 과정을 우리는 지난 몇 개월 동안 생생하게 목격한 바 있다. 진보가 상정하는 ‘시장 악마론’도 왜곡이지만 이명박 정부의 시장 접근도 협소한 신자유주의적 시장개념에 기초해 있는 것이다.

합리성-공정경쟁 못살린 탓

정작 중요한 것은 시장의 활력을 살리면서 동시에 경쟁의 공정성을 확보하는 데 있다. 우리 사회의 큰 문제는 시장이 지나치게 크거나 작다는 게 아니라, 시장의 합리성과 공정경쟁이 구현되지 못한 데 있는 것이다. 예컨대 대학입시에서의 한 차례 경쟁이 일생을 결정하다시피 하는 교육제도는 합리적이지도 공정하지도 않다. 입시가 과열되는 이유는 갈수록 작아지는 직업시장의 구조가 비합리적이고 불공정하기 때문이다. 대기업과 공기업 노동자 대 중소기업 근로자, 전문직 대 비전문직의 사회적 처우 차이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유럽 회원국들에 비해 극심한 것이다.

결국 시장은 악마도 아니며 천사도 아니다. 시장이 경제 문제에 국한되는 것도 아니다.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라는 말은 일면의 진실만을 담고 있다. 시장 실패가 정치의 실패와 뗄 수 없이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윤평중 객원논설위원·한신대 교수·사회철학

pjyoon56@kornet.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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