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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8년 3월 2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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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사태는 외환위기 닮은꼴
외환위기 당시 우리는 막대한 학습비용을 지불해야 했다. 외국 금융기관과 글로벌 투기자본은 은행을 비롯해 수많은 알짜 기업, 초대형 빌딩 등 소중한 국부(國富)를 송두리째 삼키고 말았다. 하지만 치른 비용은 헛되지 않았다. 한국의 은행들은 강도 높은 구조조정을 거쳐 날렵한 몸매로 변모했고, 낙후된 리스크관리 시스템도 쇄신했다. 부끄러워할 일만은 아니다. 위기 극복의 소중한 경험을 자랑할 만하다.
필자는 외환위기 직후 서울보증보험 사장으로, 카드 대란 직후 LG카드 사장으로 위기와 직접 맞섰다. 그 경험으로 얘기하지만 위기는 액면일 뿐, 그 이면에는 반드시 기회가 있다. 이 시점 미국의 좌충우돌을 보면서도 위기 뒤에 찾아올 기회에 대한 기대가 앞선다.
언뜻 파고(波高)가 세계 금융시장을 삼켜버릴 것 같지만 근본적으로 경제는 전진하고 있고 경기는 반드시 회복된다. 우리가 저평가된 달러 자산을 확보하며 유럽으로, 아시아로 뻗어나갈 수 있는 적기(適期)라는 사실을 꿰뚫어 보아야 한다. 브랜드 가치만 수조 원에 이르던 베어스턴스가 고작 2300억 원에 팔렸다면 다른 기업들은 어떻겠는가.
요즘 들어 국민소득 4만 달러 시대 진입은 우리 금융인들의 몫이라는 사명감을 갖게 됐다. 그동안 자동차, 반도체, 조선, 정보기술(IT)이 우리 곳간을 채워주었다면 이제는 금융이 차세대 성장엔진으로, 수출산업으로 나설 것이다. 미국, 영국과 같은 선진국 은행들의 해외수익 비중이 50∼70%에 이르는 데 비해 한국은 고작 3%에 불과하다.
이를 위해 정부는 규제 완화와 시장 확대를 통해 우리 금융기관들의 글로벌 경쟁력을 배가시켜야 한다. 외환위기, 카드 대란은 맷집뿐 아니라 펀치력도 키웠다. 축적된 경쟁력을 분출해야 할 시기다. 규제가 시장 참여자들의 창의성과 혁신 역량의 발목을 잡게 해서는 안 된다.
또한 서울을 서브프라임 모기지 부실 사태와 같은 외부 충격에도 끄떡없는 규모를 갖춘 시장, 글로벌 플레이어들이 활개 칠 수 있도록 게임의 룰이 바로 선 금융 중심지로 육성해야 한다. 서울이 홍콩, 싱가포르를 추월해 아시아 금융 중심지로 발돋움하기 위해서는 향후 2, 3년이 결정적인 시기다. 이 기간에 세계 경제권력이 아시아로 급속히 이동할 것이기 때문이다. 금융 공기업의 민영화를 포함한 ‘정부투자기관 개혁 프로젝트’ 소식이 더없이 반가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금융강국 도약 천운으로 삼아야
일희일비하지 말고 위기 극복의 기억을 되살려 시장의 추이를 지켜봐야 한다. 최근 상황은 우리의 외환위기, 카드 위기보다 훨씬 해결하기 쉽다. 게다가 우리는 지난 10년의 경험을 통해 위기 극복의 DNA를 획득했고 위기에서 기회를 찾는 지혜도 얻지 않았던가.
세계 최고의 시장 예측 능력을 자랑하는 골드만삭스조차 서브프라임 모기지 부실 사태를 ‘10만 년에 한 번 일어날 수 있는 사건’이라고 말했다. 이를 우리 민족에게 주어진 천운(天運)으로 여겨 금융 강국 도약의 교두보로 삼을 것을 제안한다.
10만 년에 한 번 조우(遭遇)할 수 있는 위기와 기회가 눈앞에 서성이고 있다. 역사적인 위기의 끝에는 역사적인 큰 장이 열린다는 과거의 경험이 필자를 묘한 흥분으로 이끌고 있다.
박해춘 우리은행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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