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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3년 4월 25일 18시 3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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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이 제창한 운동을 추진하기 위한 단체의 부침만큼 권력무상을 실감케하는 것도 없다. 김영삼 정권 때의 세계화추진위원회의 경우도 돌아보면 참 허망하다. 1994년 말 호주로 향하는 대통령 특별기 안에서 YS가 참모들에게 “내일 아침 기자간담회에서 뭘 말하면 좋겠노”라고 묻는 과정에서 느닷없이 등장한 게 ‘세계화’라는 막연한 개념이었다. 여기에 살을 붙이고 그럴듯하게 포장을 하느라 각 부처가 요란을 떤 것은 불문가지. 그렇게 급조된 세계화추진위는 그래도 사법개혁 추진과 같은 꽤 뚜렷한 족적을 남겼지만, 정권교체와 함께 어김없이 명을 다했다.
▷박정희 정권 때 농촌재건운동으로 시작한 새마을운동만은 30여년 동안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아직도 새마을운동중앙회는 정부지원을 받고 관공서엔 새마을기가 걸린 곳이 많다. 전국적인 네트워크를 형성한 게 질긴 생명력의 요인으로 꼽힌다. 정부수립 50주년인 98년 광복절에 김대중 대통령이 제안한 제2건국운동도 새마을운동을 모델로 한 것이었다. 당초엔 세계화추진위 같은 자문기구를 구상했다가 전국적인 국민운동조직으로 발전시키려 한 게 제2건국위 비운의 시작이었다. 출범 전부터 야당의 거센 반발과 여론의 호된 비판을 받은 제2건국위는 그 후 이도저도 아닌 상태로 4년반을 소일했다. 한때는 제2건국위 위원도 관과 줄이 닿는다 해서 지방에선 자리다툼도 볼 만했지만.
▷새마을운동이 한창이던 때가 운동권학생들의 농촌봉사활동(농활)도 가장 활발한 시기였다. 노무현 정권의 개혁 핵심세력인 70, 80년대 운동권출신도 그 세대다. 또한 국제화와 세계화를 구별하고자 했던 YS정권은 바로 세계화의 파도를 타고 몰아닥친 환란(換亂) 속에 저물었다. 그리고 DJ가 제시한 제2건국운동의 3대 방향 중 첫째가 ‘참여’였으나, 참여정부를 표방한 노 대통령은 제2건국운동을 ‘실패한 운동’으로 규정했다. 5년 뒤엔 또 어떤 역사의 아이러니가 기다리고 있을지….
임채청 논설위원 ccl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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