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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1999년 5월 12일 19시 3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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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뜻 골프채를 보니 꽤나 오래된 것 같았다. 호기심에 무슨 채냐고 물었더니 34년된 ‘윌슨’표라고 했다. 이 코스에서 골프를 처음 배울 때 1백달러에 산 것인데 지금껏 쓰고 있다는 것이다. 조막만한 감나무 헤드가 오랜 타구로 닳아 있었다. 아이언 바닥은 오랜 세월 잔디를 깎아 칼날같았고 스틸샤프트도 골동품 색깔이었다.
“그간 새로 나온 소재에 새로운 모양의 채도 많이 나왔는데…”하고 말을 건넸더니 천만의 말씀이었다. 마치 조강지처와도 같이 몸이 밴 이 채보다 더 좋은 채가 어디 있느냐고 반문했다. 그러면서 그 낡은 채를 매번 칠 때마다 정성껏 닦아 커버를 씌워 캐디백에 담았다. 놀랍다기보다 존경심마저 들었다. 개비한지 얼마 안되는 내 골프채가 겸연쩍기만 했다.
그로부터 며칠 후 하림이란 퍼블릭 코스에 갔다. 거기서도 또 다른 밥을 만났다. 이 밥에게 “웬 밥이 그리 흔하냐”고 했더니 미국 남자이름에는 로버트가 많은데 그 애칭이 밥이라고 설명해 주었다. 이 밥은 드라이버 거리가 2백50야드 정도에 핸디캡이 10이라고 했다. 나와 비슷한 또래인데 주눅이 들 지경이었다.
골퍼들은 골프채에 관심이 많은 법이라서 이번에도 “무슨 골프채이기에 그리 잘치느냐”고 물으면서 염치불구하고 캐디백을 들여다 보았다. 골프채 만물상 같았다. 채마다 각기 다른 상표였다. 클럽마다 좋다고 알려진 브랜드를 찾아 부품을 사서 자기 취향에 맞게 직접 조립해 쓴다는 것이었다. 우선 비용도 적게 들고 체형에도 잘 맞고 취미도 살리고 일석삼조라는 것이었다.
검소하고 실리적이고 자기 생활에 충실한 미국인의 모습을 골프장에서 새삼스럽게 발견했다. 체면을 앞세워 낭비하기 쉬운 우리와 너무 대조적이었다.
성욱기<한국해외기술공사 고문·전충청은행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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