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내 인생을 바꾼 그것]화가 김병종 교수의 글쓰기

  • 동아일보
  • 입력 2011년 8월 2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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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그리듯 글을, 글 쓰듯 그림을… 내 감성의 뿌리는 하나

화가가 왜 글을 쓰느냐고? 너무도 좋아하기 때문이다. 그림과 더불어 있는 시간만큼, 글 쓰는 시간이 황홀해서다. 그림 그리기가 삶의 한 방식인 것처럼 글쓰기도 유력한 삶의 방식이기 때문이다. 과천=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화가가 왜 글을 쓰느냐고? 너무도 좋아하기 때문이다. 그림과 더불어 있는 시간만큼, 글 쓰는 시간이 황홀해서다. 그림 그리기가 삶의 한 방식인 것처럼 글쓰기도 유력한 삶의 방식이기 때문이다. 과천=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사람이 한 우물을 파야지….”

숱하게 들었다. 형님은 “그렇게 미대에 가고 싶다더니 막상 들어와 놓고는 왜 문학이나 연극판으로 돌아다니느냐”고 못마땅해했다. 불민한 제자가 화폭에 쏟는 끼와 열정의 깊이를 알아챈 은사는 그의 예술적 산만함이 못내 불만이었다.1974년 입학한 서울대 미대. 그러나 김병종(58·서울대 미대 교수)은 그렇게 하고자 했던 미술에 오롯이 몰두하지 못했다. 그림보다는 글쓰기의 욕망이 내부에서부터 쉬지 않고 삐죽삐죽 터져 나왔다.

○ 그림과 글, 표현수단의 양면

김병종은 1975년 1월 입대하기 전까지 서울대 ‘대학문학상’을 시와 산문으로, 숙명여대가 주최한 ‘범(汎)대학문학상’을 소설로 석권했다. ‘문청(문학청년)’의 거침없는 질주였다. 어찌 보면 문학으로 도피하는 듯도 했다. 한때 그는 “기존 미술사, 미술이론에 실망해 미술에 흥미를 잃었다”거나 “학비와 생활비를 마련하려다 보니 상금이 꽤 두둑한 문학상을 노렸다”며 ‘도피’의 이유를 들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는 “글쓰기는 이성으로 통제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본능에 가까운 것이다”라고 말한다.

1977년 10월 제대한 뒤에는 희곡에 빠졌다. 고려대 영문과 교수였던 연극평론가 여석기 선생 댁에서 열린 극작가들의 희곡워크숍에 우연히 참석한 게 계기였다. 이전엔 글이란 자신의 감성과 상상력을 통해 원고지의 네모 칸을 채워 정적(靜的)으로 남아 있는 것이라며 자족했다. 그러나 자신이 쓴 대사를 배우가 읊고 관객이 호응하는 모습을 보면서 글이 살아 있는 생선처럼 퍼덕인다는 느낌을 받았다. “언어가 살아서 날아다니고 뛰어다니는 듯한 신기한 체험을 했어요.”

이후 그는 연극판에서 살다시피 했다. 대학을 졸업하기도 전에 그의 희곡 네다섯 편이 기성 극단을 통해 무대에 올랐다. 수업을 빠지는 일도 부지기수였고 그럴 때마다 ‘미술학도가 그림에 전념해야지 무슨 연극판에…’라는 주위의 지청구도 늘어만 갔다. 연극계 사람들은 그를 ‘취미로 그림 그리는 사람’으로 알았다.

글이 갑작스레 김병종의 삶에 끼어든 것은 아니다. 그림이 아주 어렸을 때부터 풀 길 없는 원초적 욕망이었다면 글(책)은 중고등학교 시절 밤을 새우게 하는 지적인 욕망이었다.

그는 서너 살 때부터 마구 그림을 그렸다. 땅바닥에, 벽에, 형과 누나들의 교과서에 닥치는 대로였다. 초등학교 시절에는 새벽같이 학교에 나와 칠판 가득 그림을 채웠다 지웠다 반복하며 황홀해했다. 글에 대한 열망은 자신도 모르게 분출됐다. 중학교 시절 주제넘게 알베르 카뮈, 보들레르, 장 폴 사르트르의 책을 읽었고 시집도 펴냈다. 고등학교는 남독(濫讀)의 시기였다. 백일장에서 산문 장원도 했지만 혼자만의 세계 속에서 게걸스럽게 책을 읽으며 몽상에 빠지는 비현실적인 나날이었다. 어렵사리 택한 진로가 미술이었다. 돌아가신 아버지 대신 집안을 책임졌던 형님은 법대(행정학)를 가서 공무원이 되라고 했지만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반대하는 사랑에 더욱 불붙듯 그는 미술의 길로 들어섰다.

노도 같은 문청의 시기를 거치면서도 ‘그림은 언젠가 돌아가야 할 고향’이라는 생각은 떠나지 않았다. 그림과 글이 일란성 쌍생아처럼 어우러질 수 있다는 믿음이 들었다. 1980, 81년은 그런 이상이 현실로 드러난 해였다. 전국대학생미전에서 대통령상을 받았고 동아일보와 중앙일보 신춘문예에서는 각각 미술평론과 희곡이 당선됐다. 이 밖에 전국 규모의 문학, 미술상이 서너 개. 상금을 다 합치니 조그만 아파트 한 채 값이 됐다.

○ 그를 지탱하는 두 날개


생물학자 최재천 교수는 “김병종은 그림처럼 글을 그리고 글처럼 그림을 쓴다”고 했다. 글과 그림이라는 두 귀재를 함께 갖춘 옛 선비 같단다. 그것은 그림과 글, 두 세계가 퓨전처럼 섞였으면 했던 김병종의 바람과 일치한다. 물론 그림과 글의 행복한 조우가 쉽게 이뤄지지만은 않았다.

한창 연극에 몰입했던 1982년 어느 날 밤. 자신의 희곡으로 공연을 마친 연극 뒤풀이 장소였다. 연출을 맡았던 분이 말했다. “연극은 극작가의 것도, 연출가의 것도 아니다. 배우의 것이다.” 술자리가 파하고 터벅터벅 걸어오는 그의 몸은 엄청난 허무, 허탈, 피로로 미어졌다. 내가 희곡을 쓰는 행위는 죽은 것이란 말인가. 상심했다. 그는 연극을 그만두기로 마음먹었다. 자기 혼자 상상을 하고 표현해서 주역이 되는 미술로 돌아왔다.

이후 15년여는 그림에 온전히 몰두하는 시간이었다. 국내외에서 그의 작품에 대한 호평이 이어졌다. 한국화를 지키는 종손이라는 자긍심도 작지 않았다. 그러나 글에 대한 갈증은 가시지 않았다. 글을 쓰지 않은 것은 아니다. 발표를 하지 않고 쟁여놓은 작품이 수두룩했다. “그림만 열심히 그리는 화가는 못 되었던 게, 마음속에 있는 어떤 것이 아마 어떤 형태로든 글쓰기로 삐져나오지 않았을까 싶다.”

그런 그에게 1998년 조선일보가 ‘화첩기행’을 제안했다. 삽화가 글을 설명하는 방식이 아니라 글과 그림이 서로 메기고 받는 새로운 시도였다. 그동안 억눌려 왔던 글쓰기 본능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기존의 기행문이 아닌 글과 그림을 같이 만들어내는 ‘화첩기행’ 작업은 하나의 장르로 굳어졌다. 그의 염원대로 썩 괜찮은 퓨전 장르를 창조해낸 것이다.

표현하고픈 욕망에 따라 글과 그림은 서로 왕래했다. 그의 내면에서 미술과 문학은 다투지 않았다. 한 군데(그림)서 막히면 다른 한 군데(글)로 훌쩍 떠날 수 있었다. 창작 수단의 두 우물에서 나온 물은 흐뭇하게 뒤섞여 공존했다. 그는 예술에서 감성의 뿌리는 하나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그림으로 나오느냐, 문자로 표현되느냐, 이렇게 장르가 분화될 뿐이라는 것이다. 세상과 사물을 대하고 느끼는 아름다움에 대한 감성의 본질은 같은 게 아닐까 한다.

결과론처럼 들리기는 하지만 만약 그가 ‘한 우물’에만 집착했으면 어땠을까. “어느덧 그런 논리가 무너지는 시대가 아닐까요. 전혀 달라 보이는 분야를 가로지르고 오버래핑해서 제3의 에너지를 창출하는 시대의 문이 열리지 않았나요.”

○ 나, 미성숙의 덩어리

김병종은 기독교 신자다. 돌아가신 모친은 그가 부디 ‘좋은 신앙인’이 되기만을 바라셨다. 형과 누나들은 평생 새벽기도를 하루도 빠지지 않을 정도로 깊은 신앙심을 가졌다. 그 속에서 그는 신앙적 열등감을 느꼈다. 그런 열등감을 예술이라는 수단을 방패삼아 살아왔다. 창조주가 자신에게 준 능력을 마음껏 활용해 좋은 작품을 만들어내는 게 또 다른 형태의 예배요 찬양이라고 생각했다.

이순(耳順)을 몇 해 남기지 않은 이제 그게 아니었다는 깨달음이 왔다. 20, 30대에 가졌던 창작에 대한 열정은 조금도 수그러들지 않았다. 반면에 그때 했던 실수와 패착도 여전히 교정되지 않은 채 굴러왔다. “어머니 말씀대로 ‘신앙적 지진아’ 상태를 벗어나지 못했어요. 참담한 고백인데 삶으로도 신앙으로도 미성숙의 덩어리로 느껴집니다.” 그 나이가 되면 도달해야 할 인간으로서의 성숙성에 턱없이 모자란다는 자책이다.

묘하다. 기자에게는 아직도 새롭게 맞닥뜨릴 일로 가슴이 뛰는 아이처럼 들린다. 그의 호 ‘단아(旦兒·아침의 아이)’가 문득 머리를 스쳐 갔다.

민동용 기자 mind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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