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국을 떠났던 선조들]격변의 중국 한인사회

입력 1998-02-03 20:27수정 2009-09-25 2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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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대 이후 우리 사회에 열병처럼 번졌던 탈(脫)농촌 바람이 중국의 한인촌에도 불고 있다. 옌지(延吉)에서 차로 1시간 남짓 떨어진 룽징시 개산둔진 광소촌. 한인 3백가구가 모여 사는 마을에 젊은 여성은 찾아 볼 수가 없다. 대부분 힘든 농촌생활이 싫어 옌지 등 도시로 빠져나갔기 때문. 마을에는 혼기를 놓친 노총각들의 시름이 적지 않다. 주민 김모씨(68)는 너도나도 도시로 떠나는 세태가 못마땅하기만 하다. 35세가 되도록 장가를 들지 못하고 곁에 남아 농사를 짓는 아들만 생각하면 자신도 모르게 긴 한숨이 새어나온다. 그는 “마을에 서른이 넘도록 노총각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는 이들이 30명이 넘는다”면서 “이제는 주민들 사이에 아들을 총각귀신 만들지 않으려면 한족 며느리라도 들여야 하는 것 아니냐는 말도 나오고 있다”며 풀이 죽었다. 우리 민족이 중국 땅에 삶의 뿌리를 내린지 벌써 1백년이 훌쩍 넘었다. 중국에서 조선족이라 불리는 2백만의 한인들. 동북지역에서 척박한 땅을 옥토로 일궈내며 한세기 이상 조용히 살아왔던 한인사회가 동요하고 있다. 중국의 개방 정책과 뒤이은 한중수교가 농촌에서 다소 폐쇄적인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온 한인사회에 엄청난 변화를 몰고 왔던 것. 탈농촌으로 인한 농촌의 공동화(空洞化), 만연하는 사치와 향락 풍조, 가치관의 동요…. 한중수교 이후 한국기업의 중국진출이 늘면서 많은 한인들이 베이징(北京) 선양(瀋陽) 다롄(大連) 상하이(上海) 등 도시로 몰려 들고 있다. 최근 4∼5년 사이 농촌에서 도시로 떠난 한인은 20여만명. 이는 전체의 10%에 이른다. 일부에서는 19세기 말 헐벗고 굶주림에 지쳐 만주로 향했던 유민들의 이주행렬에 이은 ‘2차 민족이동’이라 부르기도 한다. 탈농촌 행렬은 농촌인구의 급속한 감소를 불러왔다. 학생수 감소로 학교들이 문을 닫는가 하면 한인들이 농사짓던 땅에 한족이 유입되면서 공동체 와해의 위기감이 감돌고 있다. 옌볜(延邊)자치주 화룡현 동성진은 94년에 67명이던 출생아 수가 지난해에는 37명으로 절반 가까이 줄었다. 현재 소학교 9개와 1개중학교가운영되고 있으나 동성진의 간부들은 이대로 가다간 2000년에는 소학교 1개 반을 꾸리기도 힘들다고 우려하고 있다. 85년부터 10년간 자치주 전체적으로 소학교 수는 4백19개에서 1백77개로, 중학교는 1백18개에서 49개로 감소한 상태다. 옌지에서 발행되는 한글신문인 ‘종합신문’의 전윤길(全潤吉·32)주임은 “결혼 적령기의 남녀 비율이 40대 1에 달하는 마을이 있는가 하면 마을 인구가 마이너스 성장률을 보이는 곳도 있다”고 말했다. 부모가 어린 자녀를 떼어두고 일을 찾아 타지로 떠나면서 자녀교육에도 큰 차질이 빚어지고 있다. 하얼빈시 교외에 있는 홍성촌은 젊은 사람들 상당수가 돈을 벌러 도시나 한국 등 해외로 떠나버려 노인이 농사를 지으며 어린 손자를 돌보는 가구도 전체 1백75호 중 3분의 1에 이른다. 주민 박모씨(68)는 “부모가 외지에 나가 있는 아이들은 성적이 떨어지는 것은물론 탈선하는 경우도 많다”고 전했다. 옌지는 중국내에서도 소비성향이 높기로 손꼽히는 도시가 됐다. 이는 옌지가 인구당 택시수가 가장 높다는 것으로도 알 수 있다. 5년전만 해도 1천대이던 택시 수가 최근 3배나 늘었고 한인들은 시내에서 가까운 거리를 오가더라도 버스 대신 10위안(元)을 주고 스스럼없이 택시에 오른다. 무선호출기가 젊은층 사이에 필수품이 된지 오래고 길거리에서도 휴대전화로 통화를 하는 이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비온 뒤 대나무에 죽순 돋듯’ 한인 거주지마다 들어서는 술집 가라오케 등 유흥업소는 흥청망청대는 소비풍조와 젊은 여성들의 탈농촌 현상을 부채질하고 있다. 옌지시내에 젊은 여성이 술시중을 드는 노래방은 수년전만 해도 얼마되지 않았으나 지금은 2백여 업소가 골목마다 성업중이다. 헤이룽장(黑龍江)성 가목사시 출신으로 선양 시내의 한 단란주점에서 일하는 한인 여성 이모씨(26). 농촌 생활이 싫어 2년전 남편과 이혼하고 무작정 선양으로 들어왔다. 손님들과 술자리를 함께 하면 보통 2백 위안의 팁을 받는다. 그녀의 한달 수입은 보통 노동자가 받는 월급의 5∼6배인 3천 위안 정도. 그녀는 “우리 가게에 돈을 벌기 위해 멀리 옌볜이나 헤이룽장성에서 온 아가씨들도 꽤 있다”고 귀띔했다. 심지어 어린 자녀의 양육을 남편에게 떠넘긴 채 술집에 나오는 이들도 있다고 한다. 농촌에서 흘러드는 한인들로 인해 대도시에는 한인들만의 노무시장도 형성됐다. 랴오닝(遼寧)성 선양의 중심가인 서탑거리 러시아 혁명열사 묘역 앞 시장통에는 날마다 한인 노무시장이 선다. 영하 20도를 오르내리는 혹한의 날씨에도 일자리를 찾아 나선 수백명의 한인들로 북새통을 이룬다. 모두가 지린(吉林)성 랴오닝성 헤이룽장성, 이른바 동북 3성의 농촌에서 무작정 올라온 한인들. 여자들은 수요가 많아 곧잘 일자리를 찾지만 남자들은 인근의 싸구려 여관에 며칠씩 머물면서 일자리를 구하기도 한다. 한인들의 인구이동이 그러나 궁극적으로 동포사회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앞으로 중국 땅에서 한인들이 더욱 깊게 뿌리박고 살아가기 위해서는 농촌에만 머물러서는 안되고 곳곳에 터전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최근 한인사회에 일고 있는 민족 고유의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한 일련의 시도들도 공동체의 앞날에 희망을 던져주고 있다. 하얼빈 선양 창춘 등 동북 3성의 주요 도시마다 최근 들어서는 한국어학교는 대표적인 예. 이들 학교에서는 우리말을 할 줄 모르는 2,3세들에게 한국어 강습을 통해 민족에 대한 애정을 키워주고 있다. 랴오닝성에서 유일한 소수민족 문화관인 선양조선족문화관(관장 변시홍)은 95년부터 매년 9월 조선족 민속절 행사를 벌여 동포 사회에 커다란 구심점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작년에는 1만5천여 한인들이 선양시내 체육관에서 한데 어울려 각종 민속놀이와 전통무용 경연을 펼쳐 다른 민족의 부러움을 샀다. 중국에 사는 한인만의 역사를 짚어보는 노력도 있다. 옌볜대학은 지난해 8월 인문학부 학생들을 대상으로 ‘중국조선족 역사강좌’를 개설했다. 강의의 주안점은 한인들의 옌볜개척 역사와 항일독립운동의 내력 등. 학생들에게 자신의 뿌리를 찾고 긍지를 심어주기 위해서다. 이 강좌를 담당하고 있는 유병호(劉秉虎)교수는 “아직은 학생들에게 대종교를 ‘단군을 모시는 종교’라고 말해 주면 ‘단군이 누구냐’고 물어 올 정도지만 점차 수강생이 늘고 있으며 열기도 뜨겁다”고 말했다. 96년 옌볜지역의 학계 문화예술계 언론계 인사들이 모여 결성한 조선족문화발전추진회(회장 조성일)도 급격한 변화의 몸살을 앓고 있는 요즘 학생백일장 개최 한인 민속경연 잡지발간 등의 사업을 통해 한민족의 얼과 전통을 지키려는 다양한 노력을 쏟고 있다. 헤이룽강신문 홍만호(洪滿浩)사장은 한인사회를 ‘격변기’로 표현한다. 순박하기만 하던 농민들이 개방화 바람 속에 어느 순간 ‘돈맛’을 알게 되고 맹목적으로 도시로 향하고 있다는 것이다. 홍사장은 그러나 “가치관의 혼란과 농촌의 공동화가 진행되는 등 부작용도 있으나 이는 시장경제로 가는 과정에서 어느 정도 불가피한 현상”이라며 “과거 선조들이 척박한 땅을 일궈냈던 지혜와 끈기를 발휘하면 한인들은 분명 이러한 부작용을 극복하고 중국사회에 우뚝 자리매김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옌지·하얼빈·선양〓김정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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