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진의 영화파일]‘아웃 오브 타임’의 덴젤 워싱턴

  • 입력 2004년 3월 11일 17시 5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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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제공 이십세기폭스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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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리우드에는 수많은 흑인배우들이 있다. 에디 머피 같은 떠벌이 흑인배우가 있는가 하면 웨슬리 스나입스 같은 액션 배우도 있고 로렌스 피시번처럼 중후한 이미지의 성격파 배우도 있다. 그 가운데 가장 지적인 이미지를 지닌 흑인배우를 꼽으라면 단연 그 주인공은 덴절 워싱턴이 될 것이다.

대다수의 흑인배우들은 스스로 원하든 원치 않든 간에 어느 정도는 거친 밑바닥의 이미지를 갖고 있다. 그에 비해 워싱턴은 우아함에 이르는 지성적 이미지와 부드러움 속의 강인함을 지니고 있다. 물론 그런 흑인배우가 과거에도 있긴 있었다. 시드니 포이티어다. 아니나 다를까. 워싱턴은 한때 ‘제2의 시드니 포이티어’ 소리를 들었다.

하지만 워싱턴은 포이티어보다 조금 더 멋스럽다. WASP(White Anglo-Saxon Protestant), 곧 백인 중산층의 구미에 더 잘 맞는다. 그래서 워싱턴을 자꾸 교양미 넘치는 흑인으로 포장시키는 것이야말로 매우 교묘한 인종차별이라는 지적도 있다. 한마디로 워싱턴 같은 흑인도 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다수의 세계 관객들이 워싱턴의 영화를 비교적 공정하게, 차별 없이 감상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늘 불굴의 투사형 이미지를 강하게 내세워 왔기 때문이다. 그는 영화에서 대개 정의를 위해 혹은 인권을 위해 싸운다.

그의 외유내강형 투사 이미지는 초기작이었던 ‘영광의 깃발’의 북군 흑인 부대원의 모습으로 시작돼 ‘크라이 프리덤’의 흑인운동가 비코, ‘말콤 X’의 혁명가 맬컴 X로 완성된다. 물론 ‘펠리컨 브리프’에서 사건의 진실을 쫓는 기자, ‘크림슨 타이드’의 해군장교, ‘필라델피아’의 변호사, ‘리멤버 타이탄’의 백인 풋볼팀의 흑인 코치 등 사이사이 보여준 역도 같은 맥락의 이미지들이다. 모두 자신 앞에 닥친 고난을 강인한 인내심으로 헤쳐 나가는 인물들이기 때문이다.

영웅적이고 선한 이미지는 흑인배우인 그에게는 축복이자 동시에 굴레가 되기도 했다. 연기 폭이 한정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안톤 후쿠아 감독의 ‘트레이닝 데이’는 워싱턴의 배우 경력에서 결정적 분수령을 이룬 작품이었다. 타락한 경찰관. 아니 그보다 세상이 얼마나 타락했는가를 뼛속 깊이 알아버린 경찰관의 분노와 자괴감, 증오 그리고 자멸에 이르는 과정을 이글거리는 눈빛과 온몸으로 열연했던 그는 이 영화로 마침내 2002년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트로피를 가슴에 안았다. 그가 아카데미 무대에 오른 것은 두 번째. 87년 ‘영광의 깃발’로 남우조연상을 받았다.

그의 신작 ‘아웃 오브 타임’은 ‘트레이닝 데이’에 이어 그의 또 다른 변신을 감상할 수 있는 작품이다. 이 영화는 마이애미의 끈적끈적한 기후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치정살인극이다. 오랜만에 만나는 필름 누아르. 배경이 되는 날씨만큼 끈적거리는 영화다. 영화에서 워싱턴도 꽤나 끈적거린다. 그런데 그 끈적거림은 이전의 워싱턴에게서는 발견할 수 없던 이상한 매력이다.

그는 이 영화를 위해 살도 찌웠으며 요부에게 알면서도 속을 만큼 바보 같아졌다. 그에게는 흔치 않은 베드신도 나온다. 12일 개봉. 15세 관람가.

영화평론가 ohdjin@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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