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첨단산업 도시로 부활한 질롱
2016년 포드 공장 문닫으며 위기… 제조업 토대속 첨단기업 유치 강화
방산-에너지-신소재 기업 모여들어… 지역총생산 年5.4% 성장 ‘호주 1위’
의료-주거-교육 인프라도 뒷받침
호주 질롱 디킨대의 ‘카본넥서스’ 공장. 남반구 최대의 탄소섬유 공장으로 이를 활용해 배터리 등을 생산한다. 질롱이 과거 양모산업의 거점이었다는 점을 현대식으로 발전시켰다. 디킨대 제공
“이곳은 호주판 실리콘밸리(Australian version of Silicon Valley)입니다.”
지난달 23일(현지 시간) 찾은 호주 남동부 빅토리아주의 대표적인 산업도시인 질롱에선 이런 표현을 쓰는 기업인들을 쉽게 만날 수 있었다. 호주에서 시드니 다음으로 인구가 많은 2대 도시 멜버른에서 약 75km 떨어진 질롱에는 방산과 신소재를 중심으로 다양한 분야의 첨단 기업이 자리 잡고 있다. 이로 인해 인구 및 경제 성장세도 두드러진다.
인구 30만 명의 질롱에는 약 100년간 미국 포드자동차와 그 협력 업체들의 공장이 자리했다. 미국 자동차산업의 메카인 미시간주 디트로이트를 본떠 ‘호주의 디트로이트’로도 불렸다. 하지만 1990년대부터 급속한 세계화로 자동차 관련 공장들이 속속 폐쇄되면서 도시 전체가 위기를 맞았다.
시 당국은 자동차 대신 방산, 신소재, 보건의료, 에너지 관련 기업 유치에 공을 들였다. 불과 11년 전인 2014년만 해도 로이터통신 등이 ‘디트로이트’와 ‘실리콘밸리’의 갈림길에 있는 도시라고 평가했지만 이제 명실상부한 첨단 도시로 거듭났다.
● 車→방산, 양모→탄소섬유로 변신
포드차 공장이 영구 폐쇄됐던 2016년 채 24만 명이 되지 않았던 질롱의 인구는 10년새 28.7% 늘었다. 현재 인구의 약 20%가 최근 5년 안에 유입됐다.
특히 지난해 8월에는 한화에어로스페이스의 첫 해외 공장인 ‘H-ACE’가 가동을 시작했다. 이곳에서 호주군의 주력 장갑차 ‘레드백’, 호주판 K-9 자주포 ‘AS9 헌츠먼’ 등이 생산될 예정이다. 한화에어로스페이스의 자회사인 한화디펜스 호주의 딘 미치 운영총괄은 “자동차와 방위산업은 금속 가공을 위주로 한다는 점에서 전반적인 공정이 매우 비슷하다”며 “질롱과 인근 지역에 관련 기술과 노하우가 풍부한 고숙련 인력이 많다”고 말했다.
1840년대부터 양모를 영국에 수출했던 질롱은 각종 털과 섬유 등을 가공하는 기술도 발달했다. 이런 전통은 현재도 이어지고 있다. 대표적으로 공학 계열이 강한 지역 명문 디킨대에서는 ‘탄소섬유’ 연구가 활발하다. 탄소섬유는 철보다 훨씬 가볍고 내구성이 뛰어나 방산, 항공우주, 자동차, 건축 등에서 각광받는 첨단 소재다. 양모와 신섬유 산업에 연관성이 많다는 데서 착안해 관련 시설들이 이 학교에 자리 잡은 것이다.
지역 기업의 이익단체 질롱제조협회(GMC)의 제니퍼 코넬리 최고경영자(CEO)는 “질롱의 기업인들은 산업 쇠퇴와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며 “당국, 업계, 학계가 모두 합심해 미래 산업으로의 전환에 나섰던 것이 오늘날의 질롱을 만들었다”고 말했다.
또한 인구의 약 10%인 3만여 명이 보건의료 분야에 종사한다. 당국이 적극적으로 디킨대와 협력해 민간 및 공공병원을 육성한 결과다. 주민들은 굳이 멜버른까지 가지 않아도 양질의 의료 서비스를 누릴 수 있다는 점에 만족한다. 내년에 문을 열 여성·어린이 전문 병원에 대한 기대도 크다.
호주 국립경제산업연구소(NIER)에 따르면 2018∼2023년 5년간 질롱의 지역총생산(GRP)은 연평균 5.4% 성장해 호주 1위를 기록했다. 같은 기간 일자리(5.1%), 인구(2.2%) 증가율 또한 각각 전국 1, 2위를 기록하고 있다.
질롱 도심에 위치한 열교환기 스타트업 ‘콘플럭스’의 마이클 풀러 창업자는 “직원 55명 중 약 40%가 다른 지역 출신”이라고 소개했다. 이 회사는 3D 프린팅 적층제조 특허 기술을 사용해 기계의 열을 식혀 주는 고성능 열교환기를 만는다. 글로벌 기업인 에어버스와 허니웰 등에 납품하고 있다. 그는 연고가 전혀 없는 질롱에서 창업한 이유를 묻자 “기술 인력이 많고, 이들의 거주 만족도 또한 높다”며 “기업하기 좋은 인프라와 문화를 갖췄다”고 강조했다.
● 멜버른 집값의 70%에 젊은층 몰려
실제로 질롱은 인근 대도시 멜버른의 각종 인프라를 직간접적으로 누릴 수 있으면서도 집값은 훨씬 저렴하다. 현지 부동산 업체 ‘프롭트랙데이터’에 따르면 올 6월 기준 질롱의 주택 중위값은 59만 호주달러(약 5억5000만 원)로 멜버른의 약 70%다. 초중고교에서 대학까지 이어지는 교육 여건도 우수한 편이다.
지난해 멜버른을 떠나 질롱에 정착한 30대 주민 샤비 씨는 “멜버른에 비해 생활 수준이 떨어지지 않으면서도 주거비 등이 훨씬 덜 들고 환경도 자연친화적”이라며 “온 가족이 질롱으로 온 것에 만족하고 있다”고 했다.
시는 도시 재생 사업에 6억6700만 호주달러(약 6200억 원)를 투입했다. 또 신규 주택 단지 개발에 착수해 13만9800채를 추가 공급할 예정이다. 스트레치 콘텔즈 질롱 시장은 “30, 40대들이 자녀와 함께 둥지를 틀기 좋은 곳으로 인정받은 게 도시 부활의 주요 요인”이라며 “현 추세대로라면 2041년경에는 인구가 40만 명을 넘어설 것”이라고 밝혔다.
호주 질롱은 지역 거점 대학을 ‘지역 산업 살리기’에 적극 활용했다. 특히 대학 캠퍼스에 산업단지와 맞먹는 ‘창업 허브’를 조성하는 데 공을 들였다. 기술사업화와 스타트업 창업을 도와 자칫 연구실에서 사장될 수 있는 기술을 시장으로 끌어낸 것. 또 정부와 손잡고 벤처 투자펀드를 조성해 유망 업체를 유치했다. 이제는 방위산업, 배터리, 인공지능(AI) 등 미래 산업분야에서도 도전장을 내밀고 있다.
지난달 22일 방문한 디킨대 제조업 혁신단지 ‘질롱 미래 경제지구’엔 스타트업 인큐베이터 ‘매뉴퓨처스’와 탄소섬유를 활용해 배터리 등을 생산하는 공장 ‘카본넥서스’가 나란히 자리잡고 있었다. 건물 뒤편으로는 7.2MW 규모의 태양광 단지가 펼쳐졌다. 배터리 생산과 AI 연구 같은 고전력 수요를 뒷받침할 1000A급 전력망도 깔려 있었다.
디킨대는 연구실 옆에 공장을 지었다. 연구와 생산을 가까운 공간에서 진행해 효율성을 높이자는 취지였다. 질롱 미래 경제지구에 입주한 디킨대 첨단소재연구소(IFM)에는 시제품 양산이 가능한 호주의 첫 실증형 배터리 맞춤 제작공장이 세워졌다. 카본넥서스 연구진은 말레이시아 국영 에너지기업 페트로나스와의 연구협력을 통해 공기 중 수분만으로 스스로 코팅 처리가 복원되는 ‘자가치유 코팅’을 개발했다. 해상플랜트, 송유관, 풍력 터빈 등 각종 구조물의 수명을 연장하고 유지보수 비용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는 기술이다.
첨단 제조업, 방위산업, 청정기술 스타트업이 입주한 매뉴퓨처스에는 업체마다 공장 부지가 주어진다. 50m2부터 시작해 150m2, 260m2 등으로 사업 진척에 따라 규모를 키울 수 있다. 매뉴퓨처스는 좋은 아이디어가 있는 창업가와 학내 연구진을 매칭하는 사업도 진행 중이다.
글린 앳킨슨 디킨대 창업·사업개발·기술상용화 국장은 곡선미가 돋보이는 매뉴퓨처스의 철강 외장재를 가리키며 “디킨대 연구진과 창업가가 공동 개발한 제품”이라고 소개했다. 스타트업 ‘폼플로우’는 철강을 균열 없이 90도 이상 구부리는 ‘무균열 절곡’ 기술을 상용화하는 데 성공한 뒤 2021년 공장을 짓고 매뉴퓨처스에서 퇴소했다. 앳킨슨 국장은 “이 같은 ‘졸업’ 성공 사례를 앞으로 10년간 50개를 만들어 호주의 독자적 기술 확보에 기여하는 게 목표”라고 했다.
디킨대의 ‘스타트업 산업단지’는 대학 재정에도 기여하고 있다. 오스트랄라시아(호주와 뉴질랜드를 합쳐서 부르는 표현) 지식상업화협회(KCA)에 따르면 디킨대는 지난해 스타트업 지분 투자를 통해 1억2000만 호주달러(약 1100억 원)의 수익을 거뒀다. 퀸즐랜드대에 이어 호주 대학 중 2위다. 미국 실리콘밸리의 창업 명문인 스탠퍼드대식 기술 상업화 모델이 디킨대에도 자리 잡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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