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현장을 가다/임우선]‘인플레’ ‘경기 위축’ ‘AI’… 올해 미국 ‘블프’ 풍경을 바꾼 세 가지

  • 동아일보

고물가 속에 달라진 美 ‘블랙 프라이데이’
썰렁한 오프라인 매장… “세일 해도 비싸” 반응 많아
명품 등 고가제품은 큰 타격 없어
AI로 ‘가성비 좋은 제품’ 찾기 늘어

블랙 프라이데이 주간이 이어졌던 이달 초 뉴욕 맨해튼 5번가의 한 스포츠 의류 용품점이 한적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뉴욕=임우선 특파원 imsun@donga.com
블랙 프라이데이 주간이 이어졌던 이달 초 뉴욕 맨해튼 5번가의 한 스포츠 의류 용품점이 한적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뉴욕=임우선 특파원 imsun@donga.com
임우선 뉴욕 특파원
임우선 뉴욕 특파원
《미국 유통업계가 1년 중 가장 큰 세일에 들어가는 11월 마지막 주. 이른바 ‘블랙 프라이데이’ 기간이지만 미국 뉴욕 맨해튼 5번가의 상점들은 의외로 썰렁한 모습이었다. 상점들은 저마다 ‘최대 50% 세일’ 등 홍보 문구를 내걸고 있었지만, 매장 안 손님들은 평소와 비슷하거나 약간 많은 수준으로 느껴졌다. 올해는 과거처럼 경쟁적으로 물건을 살펴보고, 집히는 대로 계산대로 가져가는 풍경을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예년에는 계산대 앞에서 긴 줄을 서는 게 예사였지만, 올해는 일부 매장의 경우 손님 수보다 응대를 위해 대기하는 직원 수가 더 많아 보일 정도로 한산했다. 양손 가득 터질 듯 쇼핑백을 든 시민들의 모습이나 오프라인에서 대폭 할인을 받아 산 TV나 청소기를 들고 지하철을 탄 뉴요커들의 모습도 예전만큼 많진 않았다.》

맨해튼 미드타운의 한 유명 가구점 점원은 “확실히 매장에 사람들이 줄었다”며 “최대 세일이라고 해도 꼭 필요한 것이 아니라면 사려 하지 않는 분위기”라고 전했다. 물건을 살펴보던 한 중년 여성은 “세일이라고 해도 여전히 비싸게 느껴지지 않냐”며 “가격이 계속 오르니 이전만큼 세일의 기쁨이 체감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로이터통신은 “오프라인 매장에서 예년 같은 대규모 줄서기가 크게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고 전하며 계속되는 인플레이션, 부진한 고용 등을 소비 위축의 배경으로 꼽았다.

● 데이터 깜깜 美 경제… ‘블프’ 주목

블랙 프라이데이 세일이 열리는 11월 마지막 주 금요일부터 사이버 먼데이 행사가 열리는 12월 첫째 주 월요일까지는 미국에서 1년 중 가장 큰 할인이 이어지는 시기다. 12월 1일 미국 뉴욕 맨해튼 5번가의 한 의류 브랜드에 세일 홍보 광고가 붙어 있다. 
뉴욕=임우선 특파원 imsun@donga.com
블랙 프라이데이 세일이 열리는 11월 마지막 주 금요일부터 사이버 먼데이 행사가 열리는 12월 첫째 주 월요일까지는 미국에서 1년 중 가장 큰 할인이 이어지는 시기다. 12월 1일 미국 뉴욕 맨해튼 5번가의 한 의류 브랜드에 세일 홍보 광고가 붙어 있다. 뉴욕=임우선 특파원 imsun@donga.com
미국의 추수감사절(매년 11월 넷째 주 목요일)이 끼어 있는 11월 마지막 한 주는 말 그대로 ‘쇼핑 시즌’이다. 모든 분야에서 1년 중 가장 대규모 세일이 진행되기 때문이다. 추수감사절이 있는 주 월요일부터 이른바 ‘얼리 블랙 프라이데이’가 시작된다. 또 금요일에는 ‘블랙 프라이데이’ 본세일이 진행되고, 그다음 주 월요일은 ‘사이버 먼데이’로 불리는 온라인 전용 세일이 펼쳐지는 것. 그러다 보니 많은 소비자들이 꼬박 한 주를 쇼핑으로 채운다. 미국 소매 경기의 최정점을 가늠할 수 있는 시기인 셈이다.

특히 올해는 미국 역사상 최장기간인 43일간 진행된 ‘연방정부 셧다운(일시적 업무정지)’으로 인해 미국의 경제 지표가 사실상 두 달 가까이 제대로 작성되지 않았다. 이에 미국의 경제 상태가 ‘깜깜이’란 우려가 커졌다. 또 미국 체감 경기의 바로미터로서 이번 블랙 프라이데이에 펼쳐질 풍경에 대한 관심이 더욱 높았다. 미국의 고물가와 고용 침체가 실물 경기에 영향을 주고 있다는 ‘위기론’과 ‘그래도 아직은 괜찮지 않냐’는 희망 섞인 전망이 공존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이번 미국 블랙 프라이데이는 전문가들에게도 결론을 내리기 힘든 ‘난해한 행사’가 됐다. 오프라인에서의 쇼핑 열기는 급감한 반면에 온라인에서의 매출은 사상 최대치를 찍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소비 경기가 과연 경제가 아직 견고하다는 방증인지, 아니면 계속되는 고물가에 조금이라도 쌀 때 물건을 확보하려는 소비자들의 고군분투의 결과인지를 두고 다양한 분석이 나오고 있다.

● “세일해도 비싸” 블프에도 양극화

올해 블랙 프라이데이 직전 미국의 소비자 심리는 한껏 얼어붙어 있었다. 매달 소비자 심리를 추적하는 미시간대의 10월 조사에서는 그 결과가 5월 이후 최저 수준을 기록했다. 미시간대는 “소비자들은 높은 물가와 취업 전망 악화 등 경제적 문제가 쉽게 나아지지 않으리라 보고 있다”며 “악화된 소비자 심리 지수는 미국인들이 자신의 재정을 우려하며 물품 구입을 주저하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분석했다.

이에 더해, 길어진 연방정부 셧다운으로 매달 저소득층에게 지원되는 연방정부 보조금이 끊기면서 취약 계층의 소비 심리는 더욱 얼어붙었다. 미국 서민 소비 경기와 직결되는 월마트와 세제와 휴지, 치약 등 생필품을 생산하는 프록터앤드갬블(P&G) 등에선 저소득층의 소비 위축을 우려하는 메시지가 쏟아졌다. 당시 안드레 슐튼 P&G 최고재무책임자(CFO)는 “미국의 상황이 매우 불안정하고, 아마 그간 봐 온 것 중에서 가장 불안정할 것”이라며 “소비재 매출에서 10월 전체 매출이 크게 감소했고 이 같은 추세가 계속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저소득층 소비자들은 연말 가족과 지인을 위한 선물 마련을 위해 일상적인 구매를 줄이고 있다”며 “미용실 염색이나 커트, 면도 서비스처럼 ‘좀 더 버틸 수 있는’ 분야의 매출은 감소한 반면에 의류, 장난감, 겨울용 상품에 대한 지출은 강세를 보이고 있다”고 분석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미국 중산층이 애용하는 백화점인 메이시스의 최고경영자(CEO)는 최근 실적 발표 후 콘퍼런스 콜에서 “소비자들이 돈을 어디에 어떻게 쓸지 점점 더 신중해지고 있다”며 “연말연시 분기 실적이 예상치를 크게 밑돌 것”이라고 비관적으로 전망했다.

올해 내내 계속된 관세 여파 등으로 기업들이 제품의 가격 자체를 올리면서 세일 체감이 줄어든 것도 블랙 프라이데이 매출에 영향을 줬다는 분석이 나왔다. 예컨대 미국에서 젊은층에게 인기 있는 A의류 브랜드의 경우 스테디 셀러인 동일 제품의 정가가 지난해에 비해 10%가량 올랐고 할인율은 20%에서 10%로 떨어졌다. 기존 제품 가격이 300달러였다면 지난해에는 블랙 프라이데이 기간 240달러에 물건을 살 수 있었지만, 올해는 인상된 330달러의 10% 할인가인 297달러를 내야 물건을 살 수 있는 셈이다.

미국의 시장조사 및 소비자 데이터 분석 회사인 서카나는 “우리가 알고 사랑하던 블랙 프라이데이는 바뀌었다”며 “지난 몇 년 동안 보아왔던 참여도나 열광도, 구매 긴박감이 덜하다”고 진단했다. 이를 바탕으로 일부 전문가들은 “연말연시 매출이 줄고 많은 가정에서 크리스마스트리 아래 놓일 선물이 줄어들 가능성이 있다”고 내다봤다.

● AI로 제품 가성비 측정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올해 블랙 프라이데이 세일 기간 동안 미국 내 온라인 판매 매출은 오프라인과 다른 흐름을 보여 경제 전문가들의 셈법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최근 전자상거래 매출을 추적하는 어도비 애널리틱스 데이터에 따르면 올해 블랙 프라이데이의 미국 온라인 매출은 전년 대비 9.1% 증가한 118억 달러로 사상 최대치를 기록했다. 세일즈포스 데이터에서는 이 시기 온라인 매출이 3% 증가한 180억 달러로 나타났다.

단, 세일즈포스 데이터에서는 매출은 늘었지만 주문량과 구매 품목 수가 전년 대비 1∼2%씩 감소한 특이점이 발견됐다. 평균 판매 가격이 7%나 증가해 소비자들이 더 적은 물건을 구입했음에도 더 많은 비용을 치러야 했다는 것이다.

카일라 슈워츠 세일즈포스 소비자 인사이트 디렉터는 “블랙 프라이데이는 미국 경제에 중요한 신호를 보냈다”며 “겉보기에는 온라인 매출이 강세를 보였지만 미국 쇼핑객들은 여전히 높은 인플레이션의 영향을 받고 있음이 드러났다”고 꼬집었다. 다만, 경기에 민감하지 않은 고소득층이 선호하는 고급 의류나 액세서리는 예년 대비 21%나 판매가 증가해 가장 많이 판매된 품목군으로 조사됐다.

한편, 미국 유통업계가 사실상 올해를 본격적인 인공지능(AI) 쇼핑 시작의 원년으로 평가하는 가운데 올해 블랙 프라이데이 온라인 매출에는 챗GPT 같은 AI나 AI 기반 챗봇이 엄청난 영향을 미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어도비 데이터에 따르면 올해 블랙 프라이데이에 미국 소매 웹사이트의 AI 트래픽은 전년 대비 805%나 증가했다. 평범한 소비자들이 기능이나 가성비 판단을 하기 어려운 TV나 게임기, 전자제품을 구입할 때 챗GPT 같은 AI에 제품 분석과 추천을 물어본 뒤 곧바로 추천 링크를 타고 들어가 구매하는 방식으로 실제 쇼핑을 했다는 것이다.

어도비는 “AI 서비스를 통해 미국 소매 웹사이트에 접속한 쇼핑객이 AI를 사용하지 않은 트래픽 소스에서 접속한 쇼핑객보다 구매로 전환될 가능성이 38% 더 높았다”고 전했다. 이에 따라 내년 블랙 프라이데이에는 AI의 매출 영향력이 더욱 커질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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