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의 이름으로 ‘셀럽’을 용서하지 않겠다[정미경의 이런영어 저런미국]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3월 18일 12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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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와 명예를 가진 자가 피고석에서 안절부절
‘셀럽’ 재판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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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 매기(가운데)와 아들 폴(왼쪽) 살해 혐의로 기소돼 유죄 판결을 받은 알렉스 머독 변호사(오른쪽). 위키피디아
아내 매기(가운데)와 아들 폴(왼쪽) 살해 혐의로 기소돼 유죄 판결을 받은 알렉스 머독 변호사(오른쪽). 위키피디아


“Trial of the Century.”
(세기의 재판)
최근 미국인들의 눈과 귀는 사우스캐롤라이나주 콜레턴 카운티 지방 법원에 쏠려 있습니다. 인구 4만 명도 안 되는 작은 도시 법원에 뉴욕타임스, CNN 등 전국 언론사들이 몰려와 야단법석을 떤 것은 알렉스 머독이라는 유명 변호사가 저지른 살인사건 때문입니다.

법과 정의를 수호해야 하는 변호사가 살인이라는 중죄를 저지른 데다가 피해자가 가족이라는 점 때문에 이번 재판은 한 달 넘게 미국을 떠들썩하게 만들었습니다. 결정적으로 관심을 끈 것은 머독의 부와 명예였습니다. 이 지역은 “머독 왕국” “머독 왕조”라고 불릴 정도로 100년 이상 머독 가문이 지배해 왔습니다. 하지만 머독은 검사장을 지낸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사진이 걸린 법정에서 아내와 아들을 총으로 쏴 숨지게 한 혐의로 2차례 종신형을 선고받았습니다. 재판 과정에서 존경받는 법조인의 사기 행각과 마약 사용 등 부도덕한 사생활이 만천하에 드러났습니다.

많은 할리우드 영화와 드라마에서 보듯이 미국인들은 재판을 좋아합니다. 특히 사회 지도층 인사가 피고석에 앉는 재판은 더욱 그렇습니다. 방송국들은 정규 프로그램을 수시로 중단해가며 머독 재판을 생중계했습니다. 언론이 머독 재판에 붙인 별명은 “trial of the century.” “세기의 재판”이라는 단어가 남발되는 경향이 있지만 그만큼 유명인이 연루된 사건·사고가 잦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미국 역사에 길이 남는 ‘세기의 재판’을 알아봤습니다.

찰스 린드버그 아들 유괴사건 재판 모습. 높은 의자에 앉은 사람은 린드버그이고, 그와 정면으로 마주 보고 있는 사람이 피고 브루도 리처드 하우프만이다. 위키피디아
찰스 린드버그 아들 유괴사건 재판 모습. 높은 의자에 앉은 사람은 린드버그이고, 그와 정면으로 마주 보고 있는 사람이 피고 브루도 리처드 하우프만이다. 위키피디아


“Send Hauptmann to the chair!”
(하우프만을 의자로 보내라!)
‘세기의 재판’ 시초는 1935년 비행가 찰스 린드버그 아들 유괴사건입니다. 범인은 5만 달러의 몸값을 요구하는 편지를 남기고 린드버그의 20개월 된 아들을 유괴했습니다. 유명 정치 가문 출신의 린드버그는 1927년 대서양을 논스톱으로 단독 횡단해 영웅 대접을 받고 있었습니다. 아들을 찾는데 대통령을 비롯해 전 국민이 나섰습니다. 당시 감옥에 있던 마피아 두목 알 카포네까지 조폭 네트워크를 활용해 범인을 잡겠다고 제안했습니다. 하지만 50여 일 후 아들은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됐습니다.

경찰은 몸값에 사용된 지폐 일련번호를 추적해 브루노 리처드 하우프만이라는 독일계 이민자를 체포했습니다. 재판이 열린 뉴저지 법원은 군중들로 인산인해였습니다.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밖에 모인 군중들은 “하우프만을 의자로 보내라”라는 구호를 외쳤습니다. “chair”는 “electric chair,” 즉 사형집행용 전기의자를 말합니다. 하우프만은 무죄를 주장했지만, 배심원들은 상황증거만으로 유죄 판결을 내렸습니다. 이듬해 하우프만의 사형이 집행됐습니다. 지금까지도 유죄 여부에 대한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이 사건은 후폭풍을 몰고 와 일명 ‘린드버그법’으로 불리는 ‘연방납치법’이 제정됐습니다. 어린이가 실종 또는 유괴됐을 때는 자동으로 연방수사국(FBI)이 개입해 수사를 담당하게 됩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피고석에 앉은 독일 나치 전범들. 위키피디아
제2차 세계대전 후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피고석에 앉은 독일 나치 전범들. 위키피디아


“There comes a point when a man must refuse to answer to his leader if he is also to answer to his own conscience.”
(인간이 양심에 답하려면 자신의 지도자에게 답하기를 거부해야 할 때가 온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독일의 전쟁범죄를 처벌하기 위한 재판이 열렸습니다,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 등 승전 4개국의 판사 8명과 검사 4명으로 구성된 국제군사재판소가 독일 뉘른베르크에 개설됐습니다. 피고는 나치 고위간부 24명이었습니다. 아돌프 히틀러와 그의 양팔 격인 파울 요제프 괴벨스, 하인리히 힘러는 종전 직전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기 때문에 제외됐습니다.

검사들의 입에서 많은 명언이 쏟아졌습니다. 영국 검사인 하틀리 윌리엄 쇼크로스 남작의 발언이 가장 널리 알려졌습니다. 그는 모두진술에서 “인간이 자신의 양심에 따라 행동하려면 지도자의 명령을 거부해야 할 때가 온다”라고 말했습니다. 상급자의 명령에 따른 것이기 때문에 죄가 없다고 주장하는 전범들에게 형사적 책임을 물을 수 있다는 논지였습니다. ‘answer’는 ‘대답하다’라는 뜻 외에 ‘들어맞다’라는 뜻으로도 많이 씁니다. 광고 문구에서 “this machine will answer your needs”라고 하면 “이 기계는 당신의 요구에 부합한다”라는 뜻입니다.

피고 24명 중 12명에게 사형이 선고됐습니다. 사형수 대부분은 나치 광신자들이었기 때문에 죽음을 맞는 순간까지 반성의 기미를 보이지 않았습니다. 여담으로 뉘른베르크 재판은 통역 기술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했습니다. 4개국과 독일은 각기 다른 언어를 썼기 때문에 동시통역이 처음 등장했습니다. 통역 조달은 IBM이 맡았습니다.

‘시카고 세븐’ 재판에서 승리한 뒤 기뻐하는 반전운동가 7명과 변호사들. 위키피디아


“This is the Academy Awards of protests and as far as I‘m concerned it’s an honor just to be nominated.”
(이건 시위의 아카데미상이고, 나로 말하자면 그저 후보에 오른 것만도 영광이다)
‘시카고 세븐’ 재판은 1968년 폭력시위를 주도한 혐의로 7명의 반전운동가가 기소된 재판을 말합니다. 이들에 대한 무죄 판결은 기득권 저항의 승리라는 점에서 미국 재판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합니다. 1968년은 진보주의자들에게 충격적인 해였습니다. 4월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암살된 데 이어 6월 대통령에 출마했던 로버트 케네디 상원의원이 암살됐습니다. 절망감을 분출할 곳이 없던 젊은이들은 8월 민주당 전당대회로 몰려들었습니다.

경찰은 강력한 진압 작전을 위해 3만명의 병력을 대회장 주변에 배치했습니다. 시위대 1만명을 훨씬 능가하는 병력이었습니다. 경찰과 시위대가 충돌하면서 부상자가 속출했습니다. 반전단체 리더 7명은 음모죄 및 폭동선동죄로 기소됐습니다. 이들은 법정에서 소요사태는 경찰의 과도한 폭력 사용 때문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들은 재판을 거부한다는 의미로 각종 퍼포먼스를 선보였습니다. 판사 복장을 하고 피고석에 등장하는가 하면 증거물을 가지고 장난을 쳤습니다. 검사의 질문을 조롱하는 답변을 내놓았습니다.

7명 중 한 명인 리 와이너는 시위 가담 여부에 대한 질문에 “주동자로 낀 것만으로 영광”이라는 답했습니다. “후보에 오른 것만으로 영광”이라는 아카데미상 수상자들의 단골 소감에 빗댄 것이었습니다. 방청석은 웃음바다가 됐습니다. 7명에게는 법정모독 혐의까지 추가됐습니다. 1심에서 유죄 판결을 받았지만, 항소심에서 재판부의 공정성 결여를 이유로 무죄로 뒤집혔습니다. ‘시카고 세븐’은 사회운동계의 스타가 됐습니다. 이들 중 한 명인 톰 헤이든은 이듬해 여배우 제인 폰다와 결혼해 다시 한번 세상을 놀라게 했습니다.

명언의 품격
OJ 심슨 재판에서 심슨이 배심원들 앞에서 문제의 장갑을 착용한 모습. 뒤쪽은 쟈니 코크란 변호사. 위키피디아
OJ 심슨 재판에서 심슨이 배심원들 앞에서 문제의 장갑을 착용한 모습. 뒤쪽은 쟈니 코크란 변호사. 위키피디아
정치 사회적 파장이 큰 사건에 쓰였던 ‘세기의 재판’이라는 단어는 1990년대부터 ‘셀럽’ 문화의 등장으로 연예인이나 갑부와 관련된 흉악 사건에 쓰이게 됐습니다. 그 시작은 ‘OJ 심슨 사건’입니다. 미식축구 선수 출신의 영화배우이자 스포츠 해설가인 심슨이 전처 니콜 브라운 심슨과 식당 종업원 론 골드만을 살해한 혐의로 기소됐으나 무죄 판결을 받은 사건입니다.
“If it doesn’t fit, you must acquit.”
(맞지 않으면 무죄다)
재판에서 나온 가장 유명한 발언은 심슨 변호사인 쟈니 코크란의 입에서 나왔습니다. 검찰이 심슨이 범행 때 착용했다고 주장한 가죽장갑이 심슨의 손에 맞지 않자 코크란변호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짧은 구절에 운율이 잘 살아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마지막 단어인 ‘fit’(피트)과 ‘acquit’(어퀴트)의 ‘t’ 발음이 맞아떨어집니다. 한국말로 하면 발언의 온전한 의미가 전달되지 않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심슨 변호인단의 일원이던 제럴드 울먼 산타클라라 법대 학장이 고안해낸 구절입니다. 코크란 변호사가 재판 중에 두 차례 말했습니다. 심슨이 장갑을 착용하는 시범을 보였을 때와 변론을 마무리하는 최후진술 때입니다. 최후진술 때가 더 효과가 컸습니다. 숙의를 시작하는 배심원들에게 맞지 않는 장갑을 상기시키며 무죄 판결이 ‘must’의 의무라는 점을 주지시켰습니다. 배심원들은 나중에 언론 인터뷰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한마디로 꼽았습니다.

실전 보케 360


인도 뉴델리에서 열린 주요20개국(G20) 정상회의에서 만난 토니 블링컨 미국 국무장관(왼쪽)과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장관(오른쪽). 미 국무부 홈페이지
인도 뉴델리에서 열린 주요20개국(G20) 정상회의에서 만난 토니 블링컨 미국 국무장관(왼쪽)과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장관(오른쪽). 미 국무부 홈페이지
실생활에서 많이 쓰는 쉬운 단어를 활용해 영어를 익히는 코너입니다. 최근 러시아 외무장관이 망신살이 뻗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장관은 인도에서 열린 주요20개국(G20) 정상회의에서 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한 질문을 받고 “러시아가 침략을 당한 전쟁”이라고 답했습니다. 청중들로부터 폭소로 터졌습니다. 폭소를 무시하고 “러시아는 이 전쟁을 멈추려고 노력하고 있다”라고 하자 청중들로부터 이런 야유가 쏟아졌습니다.

“Come on!”
(왜 이러실까!)
‘come’은 미국인들이 자주 쓰는 단어이고, ‘on’도 그렇습니다. 이 둘이 결합한 ‘come on’은 다양한 상황에서 쓸 수 있습니다. 가장 많이 쓰는 상황은 이번처럼 상대방이 말한 내용을 부정할 때입니다. 청중들은 라브로프 장관의 어이없는 주장을 반박하려고 “come on”이라고 했습니다. 이럴 때는 뒤쪽의 “on”을 길게 빼면서 강조합니다. 두 번째는 “힘내” “덤벼 봐”라는 의미로 응원할 때입니다. 스포츠 경기에서 기합을 넣을 때 씁니다. 이때는 앞쪽의 “come”에 강세가 옵니다. 마지막으로 남녀관계에서 유혹하는 행위를 말합니다. 이때는 “come-on”이라는 명사 형태로 많이 씁니다. “He ignores come-ons from many women”이라고 하면 “그는 많은 여성의 유혹을 뿌리쳤다”라는 뜻이 됩니다.

이런 저런 리와인드
동아일보 지면을 통해 장기 연재된 ‘정미경 기자의 이런 영어 저런 미국’ 칼럼 중에서 핵심 아이템을 선정해 그 내용 그대로 전해드리는 코너입니다. 오늘은 2018년 7월 3일 소개된 미국의 시위 문화에 관한 내용입니다. 미국 시위는 한국과 다릅니다. 시위 구성원들이 ‘즐기는’ 분위기가 강합니다. 좋게 말하면 사위가 자유롭고, 나쁘게 말하면 어수선합니다.

2018년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가족격리 이민정책에 반대하는 시위가 미국 전역에서 열렸다. 위키피디아
2018년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가족격리 이민정책에 반대하는 시위가 미국 전역에서 열렸다. 위키피디아
요즘 미국이 시끌시끌합니다. 불법이민자 부모와 자녀를 격리하는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정책 때문입니다. 이 정책에 반대하는 시위가 미국 전역에서 벌어졌습니다. 가족 단위의 시위대가 눈에 띄게 많았습니다. 집에서 만들어온 듯한 형형색색 피켓을 들고나온 시위대는 초대연사의 연설을 듣고 노래를 따라 불렀습니다. 가족 축제 같았던 이번 시위에 등장한 구호들을 소개합니다.

“Families belong together.”
(가족은 함께 있어야 한다)
시위대의 피켓과 플래카드에 가장 많이 걸린 구호입니다. 한국 시위에 등장하는 “결사반대” “물러가라” 같은 자극적인 구호가 아닙니다. 하다못해 “no family separation”(가족격리 반대)도 아닙니다. “가족은 함께 있어야 한다”라는 긍정의 메시지입니다. 이처럼 미국 시위는 상대의 잘못을 공격하고 대가를 치르도록 하는 데 초점을 맞추기보다 ‘우리 모두 힘을 합쳐 고쳐나가자’라는 공감대 조성에 초점을 맞춘 구호들이 많습니다.

“We are better than this.”
(우리는 이것보다 낫다)

짧은 구호지만 깊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we”는 미국의 정신을 말합니다. “this”는 이번에 문제가 된 트럼프 대통령의 반(反)이민 정책을 말합니다. “우리는 이것보다 낫다”라는 것은 “미국은 이런 정책을 수용할 정도로 추락하지 않았다”라는 자존심의 표현입니다. “미국은 트럼프 대통령보다 더 나은 지도자를 만날 자격이 있다”라는 의미까지도 포함돼 있습니다.

“You will come of age with our young nation.”
(너는 우리의 젊은 나라에서 성장할 것이다)

시위대가 부른 노래에 이런 구절이 등장합니다. 브로드웨이 인기 뮤지컬 ‘해밀턴’에 나오는 노래 ‘Dear Theodosia’(시어도시아에게)의 가사입니다. ‘해밀턴’의 제작자 겸 배우인 린마누엘 미란다는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시위에서 직접 노래를 불렀습니다. 미란다는 반(反)트럼프 운동가로도 유명합니다. ‘come of age’는 소년이 청년에서 성인으로 커나가는 과정을 말합니다. ‘성장 영화’를 ‘coming-of-age movie’라고 하죠. “너는 우리의 젊은 나라(미국)에서 커나갈 것이다”라며 부모와 헤어지게 된 불법이민자 자녀들을 격려하는 내용입니다.



정미경 기자 micke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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