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차박’ 라이프 환상, ‘페티토 사건’으로 깨지나[정미경 기자의 청와대와 백악관 사이]

정미경 기자 입력 2021-10-05 16:56수정 2021-10-05 1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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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기사와 관련없음. 픽사베이
지난 한달 간 ‘페티토’라는 단어로 미국 사회가 떠들썩했습니다. 약혼자와 함께 여행을 떠났다가 실종된 후 시신으로 발견된 개비 페티토(22)라는 여성입니다. 우리 나라의 ‘한강 대학생 사망 사건’처럼 수많은 인터넷 탐정을 양산하면서 전국을 뒤흔들더니 사법당국이 약혼자 브라이언 론드리(23)를 용의자로 지목한 뒤부터 관심이 시들해진 듯합니다. 행방이 묘연한 론드리를 추적하는 지금은 언론에 기사 몇 줄 보이지 않습니다.

최근 한 달간 미국인들의 지대한 관심을 모은 ‘개비 페티토 실종 사망 사건’의 피해자 페티토가 여행 기간 중 자신의 소셜미디어에 올린 사진들. 개비 페티토 인스타그램
페티토 사건이 전국적인 관심을 불러일으킨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우선 ‘밴 라이프(Van Life)’에 대한 동경입니다. 한국에서도 인기 많은 ‘차박’의 미국 버전이 ‘밴 라이프’입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주로 주말이나 휴가를 이용해 차에서 간단하게 생활하는 단기 차박러들이 많지만 미국에서는 차를 개조해 그 안에서 먹고 자고 여행하는 것을 직업으로 삼는 젊은이들이 많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이들을 ‘밴 라이퍼’라 부릅니다.

밴 라이프용 차량은 차에서 생활할 수 있도록 꾸며져 출시되는 캠핑카와는 다른 개념입니다. 우리 나라 봉고 스타일의 밴 차종이 개조용으로 인기가 높습니다. 내부에서 숙식을 해결할 수 있는 사계절용 차가 필요하므로 단열재와 난방 시스템을 설치하고 통풍기, 태양전지판, 발전기가 필요합니다. 직접 개조할 수 있도록 돕는 DIY용품 업체들도 성업 중입니다. 미국 캠핑 전문사이트에 따르면 개조 비용은 1~2만 달러(1200~2400만원) 수준이 많다고 합니다.

차에서 생활하면서 글과 사진, 동영상 등을 소셜미디어에 올리는 것이 밴 라이퍼의 일상입니다. 구독자가 많아지면 광고가 붙고 후원기업이 생기면서 수입이 올라갑니다. 밴 라이퍼는 ‘사진 빨’ ‘영상 빨’을 중시하기 때문에 소셜미디어 중에서도 특히 인스타그램과 유튜브를 선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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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티토가 약혼자 브라이언 론드리와 함께 여행을 하기 위해 개조했던 차량 내부. 뉴스위크
페티토 역시 인스타와 유튜브를 주 무대로 활동하는 밴 라이퍼였습니다. 고교 시절부터 알고 지냈던 페티토와 론드리는 지난해 약혼했습니다. 대학에 진학하지 않은 이들은 자유로운 삶을 원했고, 당분간 밴 라이퍼로 살기로 했습니다. 페티토는 여행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파트타임 약제보조사로 일하기도 했습니다. 커플은 2012년형 포드 트랜짓 밴을 개조해 7월 초 4개월 일정의 대륙횡단 여행에 나섰습니다.

여행 시작 후 사건이 일어난 8월 말까지 2개월 동안 페티토는 인스타에 19개, 유튜브에 1개의 게시물을 올렸습니다. 그녀는 밴 라이퍼 생활을 ‘모험(adventure)’이라고 표현하며 즐거워했습니다. 론드리는 자주 페티토의 게시물에 등장했고, 가장 먼저 댓글을 달았습니다.

소셜미디어에 보이는 삶은 자신이 외부에 보여주고 싶은 삶입니다. 목격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페티토-론드리 커플의 실제 밴 라이프는 행복하지 않았지만 소셜미디어에서는 갈등의 흔적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가정폭력 신고로 경찰이 출동할 정도로 크게 다퉜던 8월 12일 이후에 올린 게시물에서조차 “우리는 별이 빛나는 밤하늘을 바라봤다” “모래밭을 맨발로 걸었다” 등 여행의 낭만들로 채워져 있습니다.

지난달 1일 론드리가 홀로 플로리다 주 집을 돌아오면서 사건은 표면화됐습니다. 이어 19일 페티토가 와이오밍 주 국립공원에서 시신으로 발견됐습니다. 귀가 후 페티토의 실종 이유에 대해 계속 함구하던 론드리는 14일 산책한다며 가출한 뒤 행방이 묘연합니다. 유명 현상금 사냥꾼까지 합세했지만 2주일 넘게 론드리 추적은 지지부진합니다.

경찰이 추적 중인 페티토 사건의 용의자 론드리의 플로리다 주 노스포트 집 앞에서 언론들이 취재 경쟁을 벌이고 있다. 폭스뉴스
워싱턴포스트 조사에 따르면 페티토 사건 발생 후 일주일 동안 ‘페티토’라는 단어가 폭스뉴스에서 398회, CNN에서 346회 언급됐습니다. 하루 50~60회 꼴입니다. 집중적으로 주목 받은 것은 페티토가 처음은 아닙니다. 몰리 티베츠(2018년), 미셸 파커(2011년), 나탈리 할로웨이(2005년), 로리 해킹(2004년), 레이시 피터슨(2002년), 엘리자베스 스마트(2002년), 찬드라 레비(2001년) 등도 과거 언론을 도배했던 납치, 실종, 살인 사건의 피해자들입니다.

이들은 10~30대 백인 여성이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습니다. 아무리 피해자가 백인 여성이라도 나이대가 40~50대 이상이면 사회적 관심도가 떨어진다는 것이 정설입니다. 가임기 여성이여야 사람들 마음 속에 내재된 종족보존 본능을 자극하기 때문입니다.

미국인들에게 젊은 백인 여성은 보호받아야 하고,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구해내야 하는 대상입니다. 이를 ‘위험에 처한 아가씨(Maiden in the Peril) 신화’라고 합니다. 할리우드 영화에서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영화 ‘스타워즈’에서 레이아 공주는 다스베이더에게 붙잡히고 루크 스카이워커 일행이 구해냅니다. 하이틴 로맨스 영화인 ‘프린세스 브라이드’에서 납치된 버터컵 공주를 구출하는 것은 평민 웨슬리입니다. 심지어 영화 ‘나를 찾아줘’는 이 신화를 한번 비틀어 여주인공이 납치 자작극을 꾸미는 스토리입니다. 인신매매 조직에 납치된 딸을 구하는 전직 특수요원 아버지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 ‘테이큰’은 죽어가던 배우 리암 니슨의 커리어까지 살려냈을 정도입니다.

거슬러 올라가면 고대 그리스신화에서 기원을 찾을 수 있습니다. 안드로메다 공주를 구하는 페르세우스, 제우스의 명을 받고 페르세포네 왕비를 구출하러 출동하는 헤르메스, 아내 에우리디케를 구하려다 실패한 후 오매불망하며 죽어간 오르페우스 등 그리스신화는 젊고 아리따운 여성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건 영웅의 이야기로 가득합니다. 이 신화는 공식처럼 굳어져 이를 통과한 페티토 같은 여성은 언론의 지대한 관심을 받게 됩니다.

2002년 미국에서 큰 주목을 받은 레이시 피터슨 살해 사건의 피해자인 아내 레이시와 범인인 남편 스캇의 결혼사진. 임신 8개월 상태의 아내를 살해해 사회적 공분을 샀던 스캇 피터슨은 사형 선고를 받았으며, 이후 무기징역으로 감형됐다. ABC뉴스
그웬 아이필이라는 미국의 유명 흑인여성 언론인은 1994년 한 미디어 콘퍼런스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진행자가 “사회적으로 중요한 문제들이 많은데 언론이 지나치게 젊은 백인 여성과 관련된 사건 사고에 초점을 맞추는 게 아니냐”고 묻자, 아이필은 “만약 실종 사건이 일어났고, 그 실종 대상이 젊은 백인 여성이라면 언론은 잠도 자지 않고 줄기차게 보도할 것”이라고 답했습니다. “맞다”고 끄덕이는 공감의 박수 소리로 행사장은 떠나갈 듯 했습니다. 당시 아이필은 “실종된 백인여성 신드롬(Missing White Woman Syndrome)‘이라는 단어를 처음 사용했습니다. 이 단어가 처음 나온 27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한 것은 별로 없습니다.

정미경 기자 micke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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