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이 조지, 당신이 내 목숨을 구했어” 로드니 킹과 촬영자 홀리데이의 만남[정미경 기자의 청와대와 백악관 사이]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9월 28일 14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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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5월 미국에서 비무장 상태의 흑인 조지 플로이드가 경찰에 체포되는 과정에서 목이 눌려 사망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당시 시민들이 촬영한 동영상에서 경찰이 과잉 폭력을 사용하는 장면이 고스란히 담겼습니다.

1991년 미국 로스앤젤레스(LA) 주민 조지 홀리데이가 촬영한 로드니 킹 구타 사건. 이 동영상은 시민저널리즘의 모범 사례로 평가받고 있다. LA타임스
1991년 미국 로스앤젤레스(LA) 주민 조지 홀리데이가 촬영한 로드니 킹 구타 사건. 이 동영상은 시민저널리즘의 모범 사례로 평가받고 있다. LA타임스


조지 플로이드 사건처럼 요즘은 어디를 가도 사건 사고만 나면 스마트 폰 카메라를 들이대는 사람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과거에는 ‘시민저널리즘’ ‘시민기자’가 거창한 의미를 가졌지만 카메라 폰이 필수품이 된 지금은 누구나 공권력의 횡포를 감시하는 저널리스트가 될 수 있습니다.

휴대전화가 상용화되기 전까지 일반 시민이 현장을 포착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1991년 한인교포들이 큰 피해를 입었던 로스앤젤레스(LA) 폭동을 유발한 로드니 킹 구타 사건이 있었습니다. 당시 경찰의 과잉 진압 장면을 촬영한 동영상은 엄청난 사회적 파장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이 동영상은 조지 홀리데이라는 평범한 LA 주민에 의해 촬영됐습니다. 시민저널리즘의 힘을 보여준 중요한 인물로 평가되는 홀리데이가 최근 향년 61세에 사망했습니다. 30년 전 어떻게 그가 역사적인 장면을 카메라에 담을 수 있었는지 인터뷰 내용 등을 토대로 알아보겠습니다.

로드니 킹 사건이 전국적 관심을 불러일으키자 사건 발생 3개월 후인 1991년 6월 홀리데이(가운데)가 기자회견에서 촬영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버라이어티닷컴
로드니 킹 사건이 전국적 관심을 불러일으키자 사건 발생 3개월 후인 1991년 6월 홀리데이(가운데)가 기자회견에서 촬영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버라이어티닷컴


당시 31세의 홀리데이는 작은 배관업체를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사건이 일어나기 2주일 전 캠코더를 샀습니다. 1990년대 가전시장을 주름 잡던 소니의 ‘비디오8 핸디캠 CCD-F77’ 제품이었습니다. 딱히 캠코더를 쓸 일이 없던 그는 박스 속에 고이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26세의 로드니 킹은 LA의 흑인 무직자였습니다. 그는 여러모로 한국과 관련이 많았습니다. 1989년 한인 상점을 털다가 주인을 철봉으로 내려쳐 2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다가 사건 발생 3개월 전 가석방으로 풀려났습니다.

사건 당일인 1991년 3월 3일 친구 집에서 술을 마신 킹은 현대 엑셀 자동차를 타고 샌 페르난도 밸리의 프리웨이(고속도로)를 달리고 있었습니다. 과속 단속에 걸렸지만 차를 세우지 않았습니다. 뒤를 쫓는 경찰과 프리웨이 추격전이 벌어졌습니다. 시속 190km의 초고속 추격전이 벌어질 정도로 상황은 살벌해졌고, 경찰 헬기까지 동원됐습니다. 킹은 나중에 “음주운전으로 걸리면 가석방 조건 위반이 되기 때문에 필사적으로 도망가려고 했다”고 진술했습니다.

로드니 킹 사건 이듬해 경찰관들이 무죄 판결을 받자 LA폭동이 발발했다. 킹(가운데)은 진정을 호소하는 기자회견에서 “우리 좀 잘 지내면 안 될까?(Can we all just get along?)”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LA타임스
로드니 킹 사건 이듬해 경찰관들이 무죄 판결을 받자 LA폭동이 발발했다. 킹(가운데)은 진정을 호소하는 기자회견에서 “우리 좀 잘 지내면 안 될까?(Can we all just get along?)”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LA타임스


도주를 포기한 킹의 차가 프리웨이를 내려와 홀리데이가 살던 아파트 부근 도로에 멈췄습니다. 당시 현장에 도착한 5명의 경찰 중 한 명이 “차에서 내리라”고 명령했지만 킹은 거부했습니다. 킹이 발길질을 해서 경찰이 상처를 입었습니다. 두려워진 킹은 차에서 내렸고, 경찰 여러 명이 달려들어 용의자를 엎드리게 해서 뒤쪽에서 수갑을 채우는 일명 ‘벌떼(swarm)’ 자세로 결박을 시키려고 했습니다. 경찰은 “이 때 킹이 반항하기 시작해 테이저건으로 제압해 곤봉으로 가격했다”고 진술했습니다. 하지만 킹은 “반항하지 않았다”고 진술했고, 목격자들도 “반항하는 기미는 없었다”고 밝혔습니다.

홀리데이는 시끄러운 소리에 잠을 깼습니다. 창밖을 보니 경찰들이 누군가를 둘러싸고 때리는 것이 보였습니다. 직감적으로 “저걸 찍어야겠다”는 생각에 2주일 전 구입한 캠코더를 가져와 집 발코니에서 촬영하기 시작했습니다. 첫 사용이라 작동에 서툴렀던 그는 초점을 제대로 맞추지 못했고, 9분 동안 흐릿한 상태로 촬영됐습니다. 홀리데이는 촬영 내내 의문이 들었다고 합니다. “범인은 이미 실신 지경인데, 왜 경찰은 계속 때리는 거지?”

아침이 밝자 홀리데이는 고민에 빠졌습니다. “촬영한 테이프를 누구한테 전해줘야 하나”하는 고민이었습니다. 지금 같으면 유튜브 등 동영상을 올릴 곳은 넘치겠지만 당시는 그런 시절이 아니었습니다. 이틀 동안 고민하다가 경찰에 전화를 걸었습니다. 접수계 말단 직원인지 전화를 받은 사람은 홀리데이가 “경찰이 막 구타하는 내용”이라고 해도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낙심한 그는 평소 자주 시청하는 지역방송 KTLA에 전화를 걸었습니다. 전화를 받은 기자 역시 “테이프를 한번 가져와봐라”며 심드렁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홀리데이가 로드니 킹 사건을 촬영했던 소니 캠코너 ‘비디오8 핸디캠 CCD-F77.’ 지난해 경매에 나왔을 때 자료집에 실린 모습이다. 네이트샌더스옥션하우스
홀리데이가 로드니 킹 사건을 촬영했던 소니 캠코너 ‘비디오8 핸디캠 CCD-F77.’ 지난해 경매에 나왔을 때 자료집에 실린 모습이다. 네이트샌더스옥션하우스


테이프를 전달받은 기자는 이를 틀어본 뒤 곧바로 ‘물건’이라고 직감했습니다. 보도국장 주재로 어떻게 보도해야 할지에 대한 회의가 소집됐습니다. 특별취재팀이 꾸려져 ‘경찰 공권력 남용’에 대한 시리즈로 만들기로 했습니다.

당시 미국 TV에서는 연예인 가십이나 흥미 위주의 사건사고를 보도하는 ‘인사이드 에디션’ 등 선정적인 시사프로그램들이 인기를 끌 때였습니다. 홀리데이가 테이프를 ‘인사이드 에디션’에 넘겼다면 1회성 소비를 위해 단번에 빵 터뜨리고 말았겠지만 양질의 뉴스 제작 능력을 갖춘 지역방송국이었기 때문에 심층보도에 나설 수 있었습니다. 시리즈1회 개시용으로 홀리데이의 9분짜리 테이프가 편집 없이 전파를 탔습니다. 반응은 어마어마했습니다. CNN 등 대형 방송사들의 테이프 복사 요청이 밀려들면서 KTLA는 전국적으로 주목받는 방송국이 됐습니다. 이 시리즈로 그해 ‘방송계의 퓰리처상’으로 불리는 피바디상(뉴스 부문)도 받았습니다. 지역방송국으로는 전례가 없는 일이었습니다.

홀리데이는 시민저널리스트의 표본이라는 명성은 얻었지만 재정 수입은 미미했습니다. 촬영 테이프는 자신이 소유한 채로 복제권이나 방영권을 판매했다면 막대한 수입을 올릴 수 있었겠지만 KTLA에 테이프를 넘기면서 받은 저작권료 500달러와 기타수입 등을 합쳐 1000달러(117만원)가 전부였습니다.

2017년 LA폭동 25주년 때 촬영자 홀리데이가 로드니 킹이 구타를 당했던 바로 그 장소에 섰다. 엘파이스
2017년 LA폭동 25주년 때 촬영자 홀리데이가 로드니 킹이 구타를 당했던 바로 그 장소에 섰다. 엘파이스


역사의 한 장면에서 만났던 홀리데이와 킹은 세월이 흐른 뒤 다시 한번 우연히 만났습니다. 주유소에서 기름을 넣고 있던 홀리데이에게 누군가 다가와 “헤이, 조지”하며 아는 척을 했습니다. 이어 “내가 누군지 모르지? 당신이 내 목숨을 구해줬어”라며 웃었습니다. 그제야 상황을 이해한 홀리데이는 킹과 악수를 나눴습니다. 홀리데이는 경찰의 구타로 퉁퉁 부은 킹의 얼굴만을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에 정상적인 모습은 몰라봤던 것이죠. 그렇게 둘은 짧은 대화를 나눈 뒤 각자 자신의 길로 갔습니다. 사건 후 홀리데이와 다른 인생 경로를 밟은 킹은 LA시를 상대로 제기한 민사소송에서 이겨 380만 달러(45억원)의 보상금을 받아 갑부가 됐지만 모두 탕진하고 2012년 자신의 집 풀장에서 익사했습니다.

홀리데이는 이후 부인과 이혼하고 생활도 궁핍해져 지난해 자신의 소니 캠코더를 팔려고 경매에 내놓았습니다. 22만5000달러(약 2억6000만원)로 책정된 시작가가 너무 높았는지 구매자를 찾지 못했습니다. 그는 올해 3월 한 언론 인터뷰에서 “나는 평생 배관공으로 근근이 살아왔고, 앞으로도 몇 년 더 그렇게 살아야 할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6개월 후 세상을 떠났습니다. 코로나19로 인한 폐렴합병증이었습니다, 그는 백신을 맞지 않았다고 합니다.


정미경 기자 micke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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