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일동포 2세인 박남주 씨는 13세에 피폭된 이후 갖가지 후유증에 시달렸다. 박 씨는 동아일보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27일 히로시마를 찾는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한국인 위령비에도 꼭 헌화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아사히신문 제공
“히로시마(廣島)에 오는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평화공원에 있는 한국인 원폭피해자 위령비에도 꼭 헌화했으면 좋겠습니다. 오바마 대통령에게 일본인뿐 아니라 전쟁과 전혀 관련 없는 한국인 수만 명이 피폭됐다는 사실을 전하고 싶습니다.”
일본 히로시마에 거주하는 한국인 피폭자 박남주 씨(84)는 11일 동아일보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오바마 대통령의 방문에 대해서는 찬성도 반대도 아니지만 수많은 한국인이 피해를 입었다는 것을 절대 잊어서는 안 된다”며 이렇게 말했다. 원폭 투하 전 인구가 35만 명이던 히로시마에서는 연말까지 14만 명이 숨졌는데 그중 10%가량이 한반도 출신으로 알려져 있다.
아버지가 경남 진주 출신인 재일동포 2세로 일본에서 태어난 박 씨는 “원폭 투하일인 1945년 8월 6일 동생 2명과 전차를 타고 있다가 원폭 투하 지점에서 1.8km 떨어진 곳에서 피폭됐다”고 회상했다. 갑자기 번쩍이는 섬광과 불덩이 같은 것이 전차를 덮쳤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옆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피투성이였다. 그는 “거리로 나가니 곳곳에서 불이 났고 제대로 된 건물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며 “그때 모습은 산지옥이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다”고 말했다.
당시 머리를 다쳐 피가 났지만 다행히 큰 상처는 아니었다. 가족들도 무사했다. 하지만 그는 이후 유방암과 피부암을 차례로 겪었다. 박 씨는 “정확한 관계는 모르겠지만 원폭 피해자 중에는 암 환자가 많다”고 말했다.
원폭으로 전쟁이 끝났지만 삶의 터전은 모두 사라졌고 먹을 것도 없었다. 학교를 그만두고 풀을 뜯어먹으며 생계를 이어가는 삶은 비참했다. 일자리도 마땅치 않아 엿과 술 등을 만들어 암시장에 팔며 생계를 유지했다. 그는 “재일동포들은 공부를 잘해도 공무원이 될 수 없었고 큰 기업들도 직원으로 뽑지 않아 다들 자영업을 할 수밖에 없었다”며 “그래도 자녀교육만은 제대로 시키려고 했다”고 말했다.
같은 처지인 재일동포 피폭자와 결혼한 박 씨는 한동안 자신의 피폭 경험을 외부에 밝히지 않았다. 그는 “기억은 생생했지만 되새기고 싶지 않아서 50년 이상 입을 다물고 있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남편을 잃은 2002년 히로시마평화공원에 앉아있을 때 초등학생들이 ‘피폭 경험을 들려 달라’고 말을 걸었다. 그가 자신의 경험을 얘기하자 ‘평화에 대해 다시 생각할 수 있게 됐다’는 취지의 엽서가 왔다.
이 일을 계기로 자신의 경험을 말하기 시작했고 지금은 학교를 돌며 피폭 경험을 증언하고 있다. 또 ‘한국원폭피해자대책특별위원회 위원장’이라는 직함으로 한국에 돌아간 원폭 피해자들이 치료와 보상을 받을 수 있도록 돕고 있다.
박 씨는 “원자폭탄은 정말 잔혹한 무기다. 어떤 일이 있어도 두 번 다시 사용하면 안 된다”고 여러 차례 강조했다. 오바마 대통령의 방문에 대해서는 “히로시마에서는 이를 사죄로 받아들이는 분위기가 있다”며 “일본은 아직 한국인 피폭자에 대해 공식 사과한 적이 없는데 오바마 대통령이 온다니 뭐라 말하기 어려운 심정”이라고 했다. 그는 “오바마 대통령의 모습을 보고 싶어 피폭자 단체에 참석 신청을 했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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