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원재

장원재 부장

동아일보 정책사회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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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에 입사해 사회부 경제부 정치부 등을 거쳤습니다.

취재분야

2024-03-20~2024-04-19
칼럼79%
사설/칼럼3%
인물3%
남북한 관계3%
선거3%
사고3%
기획3%
기타3%
  • [오늘과 내일/장원재]‘장기적으로’ 효과가 있을 것이란 주문

    부동산 문제는 문재인 정부의 가장 아픈 손가락이었다. 지난 정부 말기 청와대를 출입했을 때 한 고위 관계자는 필자에게 “3기 신도시 등 정부가 발표한 공급 대책이 효과를 내려면 시간이 걸린다”며 “다음 정권이 누가 되더라도 부동산 가격은 안정될 것”이라고 했다. 부동산 가격 폭등으로 혼란이 극심한 와중에 ‘다음 정권’ 운운하는 걸 보며 한숨이 나왔던 기억이 생생하다. 이달 14일 교육부의 ‘2023년 초중고 사교육비 조사결과 분석’ 발표를 보면서 당시 생각이 났다. 지난해 초중고교생 사교육비는 정부의 ‘사교육 카르텔과의 전쟁’에도 불구하고 전년 대비 4.5% 늘며 27조1000억 원으로 사상 최대를 경신했다. 이날 브리핑에서 기자들은 “킬러(초고난도) 문항 배제 등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 출제 기조의 급격한 변화가 학생과 학부모의 불안을 자극해 학원으로 몰린 것 아니냐”는 질문을 집중적으로 던졌다. 교육부 관계자는 “불안 요인 때문에 사교육 증가가 있었던 건 맞다”면서도 ‘정책의 시차’를 거론하며 “킬러 문항 배제 등은 가야 할 길이고 안착되면 사교육 경감에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해명했다. 사실 지난해 6월 수능을 불과 5개월 앞두고 윤석열 대통령이 ‘킬러 문항’ 문제를 들고나왔을 때부터 ‘급격한 변화가 사교육을 부추길 것’이란 우려가 나왔다. 교육부 관계자도 14일 브리핑에서 “걱정 많이 했다. (4.5% 증가는) 예측보단 상승세가 꺾인 것”이라고 털어놨다. 그런데 교육부는 지난해 9월 국회에는 “사교육비 지출을 전년보다 6.9% 줄이겠다”는 목표를 제시했다. 사교육비 상승을 예상하고도 국회와 국민 앞에 현실과 동떨어진 허황된 목표를 제시한 것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내년엔 반드시 감소시킬 것”이란 교육부 말에도 솔직히 믿음이 안 간다. 지난해 ‘역대급 불수능’과 20일 정원 발표로 더 거세질 ‘의대 광풍’ 등 사교육비 상승 요인도 즐비하다. 물론 교과과정 내용만 수능에 출제하겠다는 방침이 틀렸다는 건 아니다. 그러나 사교육비 경감 대책이 계속 사교육비를 늘리는 결과로 이어진다면 학생과 학부모의 혼란을 초래하는 건 물론, 다음 정권에서 기조를 바꿀 수밖에 없게 된다. ‘장기적 기대효과’가 아예 사라지는 것이다. ‘장기적 효과’를 거론하며 ‘단기적 희생과 부작용’에 눈을 감는 건 의대 입학정원 확대도 마찬가지다. 필자는 의대 정원을 늘려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꼭 2000명씩 늘릴 필요는 없다고 본다. 정부는 “원래 연간 3000명씩 늘려야 하지만 1000명은 의료 수요 관리 등으로 해결하겠다”는 입장이다. 어차피 정책으로 보완한다면 1500명, 1800명이 안 될 이유도 없다. 그리고 의대 정원을 늘려도 의사 배출까지는 길게는 10년 걸린다. 장기화되는 환자의 고통과 국민의 불안을 생각한다면, 대학별 정원 배분 발표를 속전속결로 강행하는 대신 유연한 자세로 대화에 나서는 게 낫지 않았을까. 영국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스는 시장경제가 장기적으로 알아서 균형을 잡으니 정부가 개입할 필요가 없다는 주장에 “장기적으로 보면 우리는 모두 죽는다”고 반박했다. ‘장기적으로 괜찮아진다’는 주문만 되풀이하는 대신 눈앞의 혼란과 부작용을 최소화할 수 있는 정책을 펴야 한다는 뜻이다. 이는 사교육비와 의대 증원을 담당하는 정부 당국자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이기도 하다. 물론 ‘장기적으로는 국민을 위한 일’이라며 눈앞의 환자를 외면하는 의사들도 새겨야 할 말일 것이다.장원재 정책사회부장 peacechaos@donga.com}

    • 2024-0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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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사들과 너무 다른 의사들[오늘과 내일/장원재]

    8일이면 대형병원 전공의(인턴, 레지던트)가 병원을 이탈한 지 18일째가 된다. 2020년 집단휴업(파업) 때 전공의들이 무기한 파업을 진행했던 기간과 같다. 당시와 다른 건 정부와 전공의 단체 간 대화가 전혀 이뤄지지 않는 것이다. 4년 전만 해도 박지현 당시 대한전공의협의회(대전협) 비대위원장은 요구사항을 들고 국회 및 정부와 수차례 간담회를 가졌다. 대한의사협회(의협)와 함께 정세균 국무총리, 박능후 보건복지부 장관 등을 만나며 사태 수습을 위해 머리를 맞대기도 했다. 반면 이번에 대전협은 지난달 20일 △필수의료 패키지와 의대 2000명 증원 전면 백지화 △열악한 수련 환경 개선 △정부의 부당한 명령 철회 및 사과 등 7가지 요구사항을 발표한 후 침묵을 지키고 있다. 박단 현 대전협 비대위원장도 정부의 대화 요청에 일절 응하지 않으며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로 가끔 근황을 밝히거나 언론 인터뷰에 응하는 수준이다. 의협 역시 “전공의 복귀는 전공의가 알아서 할 일”이란 입장이다. 박민수 복지부 2차관이 전공의 5명을 만난 후 “명확하게 대표가 있고 그 대표에 의해 의사결정이 이뤄지는 구조는 아닌 것 같다. 대화 자체가 어려운 상황”이라며 답답함을 표시한 것도 사태를 누구와 어떻게 풀어야 할지 모르겠다는 뜻이다. 필자는 대화와 타협을 거부하며 버티는 전공의들을 보면서 지난해 거리로 나왔던 초등학교 교사들이 생각났다. 교사와 의사는 둘 다 국가에서 자격증을 주고, 나이가 젊어도 ‘선생님’이라는 존칭으로 불리는 직업이다. 둘 다 보살펴야 되는 학생과 환자가 있다. 지난해 7월 서이초 사건 이후 교사들은 토요일마다 거리에서 교권이 침해되는 현실을 고발했다. 질서정연하게 앉아 ‘바둑돌 집회’를 하고 집회 후 쓰레기를 치우는 모습을 보면서 ‘선생님은 다르다’는 말이 나왔고, 이들의 증언과 주장이 언론을 통해 확산되며 여론이 움직였다. 또 교사단체는 국회와 교육부, 교육청 간담회에 적극 참여하며 자신들의 의견이 반영된 교권보호 고시 및 교권보호 4법을 만들었다. 교사들이 지난해 9월 4일 ‘공교육 멈춤의 날’을 선언했을 때 부모 상당수는 자발적으로 자녀를 학교에 보내지 않았다. 고심을 거듭한 끝에 딱 하루 교실을 비우기로 했을 그 마음을 헤아렸기 때문이다. 결국 “수업에 빠지면 중징계하겠다”던 정부 방침도 백지화됐다. 당시 거리로 나섰던 교사 중 상당수는 지금 병원을 떠난 전공의들과 비슷한 또래다. 다른 점이 있다면 전공의들은 정부의 의대 증원 발표 후 제대로 된 대화나 협상, 토론 없이 너무 쉽게 무기한 환자를 떠났다는 것이다. 일부 전공의 사이에선 중국 정부에 저항하는 젊은이들의 ‘탕핑(躺平·누워서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 대응하겠다는 분위기도 있다고 한다. 하지만 누워서 아무것도 안 한다고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 병실을 떠나기 전은 물론 떠난 후에도 상대와 대화하고, 여론에 호소하고, 내부 토론을 거듭하며 최선의 대안을 찾아야 한다. 그것이 애타는 마음으로 복귀를 기다리는 환자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다. 전공의 중에는 자녀가 있는 경우도 상당수다. 이들에게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해볼 것을 권하고 싶다. 교사가 교육 시스템이 불합리하다며 학생을 버리고 무기한 교실을 이탈한다면, 그리고 이후 대화를 일절 거부하고 누워만 있다면 이를 바라보는 학부모 기분이 어떻겠는가. 교사는 교실에, 의사는 병실에 있어야 비로소 ‘선생님’이라고 불릴 자격이 생기는 것이다. 장원재 정책사회부장 peacechaos@donga.com}

    • 2024-0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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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장원재]의사가 정부를 이기는 방법

    노환규 전 대한의사협회(의협) 회장은 최근 자신의 페이스북에서 “정부는 의사들을 이길 수 없다”며 “의사들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한 것 자체가 어리석은 발상”이라고 했다. 반면 필자가 최근 만난 한 대학병원 보직 의사는 2000년 의약분업 당시를 돌이키며 “정부가 마음먹고 나서니 당할 도리가 없었다. 이번에도 의사단체가 맞서기 어려울 것”이라고 했다. 왜 이렇게 말이 다른 걸까. 의사들이 총파업을 한 것은 2000년 이후 총 3번이다. 굳이 승패로 정리하자면 2000년은 정부가 이겼고 2014, 2020년에는 의사단체가 이겼다. 그러면 언제 의사들이 이기고, 언제 졌을까. 먼저 2000년 의약분업 도입 당시 의사들은 약사 임의조제와 대체조제 근절 방안이 마련될 때까지 도입을 미뤄야 한다며 집단 휴업(파업)에 돌입했다. 하지만 의사단체와 약사단체가 내내 충돌하면서 두 집단이 ‘밥그릇 싸움’을 한다는 여론이 형성됐다. ‘약품 오남용 방지’라는 대의를 내세웠음에도 의사들 손을 들어주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결국 김대중 정부는 그해 7월 의약분업 시행을 강행했다. 또 의협회관을 압수수색하고 김재정 당시 의협 회장을 구속했다. 이후 의사단체 주장을 일부 반영한 합의안이 나왔지만 의사들이 요구했던 의약분업 철회는 실현되지 않았다. 의사단체는 2014년 정부가 원격진료를 도입하려 할 때 두 번째 총파업에 돌입했다. 여론은 파업에 비판적이었지만 동시에 상당수는 “원격의료는 오진 가능성과 의료사고 발생 위험이 크다”는 의사단체 주장에 고개를 끄덕였다. 당시 한 방송사 여론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61%는 “의사들의 집단 휴진이 문제가 있다”고 했지만 동시에 59%는 “원격진료에 반대한다”고 답했다. 결국 정부는 “의료법 개정을 미루고 시범사업을 하겠다”며 정책을 사실상 포기했다. 그리고 2020년 10년간 의대 입학정원 4000명 확대를 두고 다시 의사들의 총파업이 진행됐다. 당시 국민 상당수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고생하던 의사들에게 부채의식을 갖고 있었다. 여론조사에서 의대 증원 찬성 비율도 60% 미만이었다. 처음에 강경 방침을 밝혔던 문재인 정부는 결국 “코로나19 확산이 안정될 때까지 관련 논의를 중단하겠다”며 물러섰다. 정리하자면 의사들이 내건 대의가 공공의 이익으로 받아들여졌을 때, 그리고 자신을 희생하며 환자를 돌보는 모습을 보였을 때 국민들은 의사의 손을 들어줬다. 반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밥그릇 싸움을 하는 것으로 보였을 때는 반대였다. 그런데 이달 16일 여론조사에서 의대 증원 찬성 의견이 80%에 육박하는 걸 보면 아직까진 후자라는 인식이 국민 사이에서 더 강한 것 같다. 20일 사직서를 내고 의협회관에 모인 전공의 상당수는 자신들의 행동이 ‘밥그릇 싸움’으로 비치는 것에 민감해했다. 또 “병원을 떠나고 싶었던 전공의는 한 명도 없다”며 “필수의료에 대한 근본적인 대책”을 요구했다. 필자는 전공의들의 진심을 의심하지 않는다. 15일 집회에서 “가장 중요한 본질이 밥그릇”이라고 했던 전공의는 예외적인 경우라 본다. 만약 젊은 의사들이 사직서를 낸 후 “환자 옆을 떠나고 싶진 않다”며 가장 낙후된 지역으로 의료봉사를 갔다면 어땠을까. 적어도 정부가 지금처럼 강제수사를 쉽게 입에 올릴 순 없을 것이다. 근무 병원이든 소외지역이든 환자 옆으로 가기엔 지금도 늦지 않았다. 다시 강조하면, 국민을 위한 희생과 대의야말로 의사가 정부를 이길 수 있게 해 주는 무기다. 장원재 정책사회부장 peacechaos@donga.com}

    • 2024-0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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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장원재]저출산 정책 포기가 해법이 될 순 없다

    연초부터 여야가 저출산 공약을 발표하는 등 저출산 위기 관련 논의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늦었지만 환영할 일이다. 16년 동안 약 280조 원을 투입했음에도 출산율이 지난해 0.78명까지 떨어진 만큼 그동안 뭘 잘못했는지 리뷰는 꼭 필요하다. 본보 기자들이 프랑스 독일 스웨덴 일본 헝가리 등을 둘러보고 정책에 참고할 내용을 신년기획 ‘출산율, 다시 1.0대로’ 시리즈로 보도한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 출간된 책과 칼럼 등에선 지금까지의 노력이 성과를 못 냈으니 전혀 다른 접근이 필요하다는 주장도 나온다. 지난해 하반기 출간된 한 책은 저출산 정책 실패의 원인을 여성의 사회경제적 지위 향상에서 찾고 “페미니즘의 영향으로 여성 개인의 삶을 더 중시하는 가치관이 확산되고 양육의 사회적 가치가 하락했다”고 했다. 또 △여성의 사회 진출을 우대하는 모든 정책을 폐지하고 △중하층 남성 노동자를 위한 정책을 마련하라고 주문했다. 올 초 출간된 다른 책도 “여권 신장이 자녀의 필요성을 낮춰 저출산을 유발한다”며 “(무자녀 가정에 대한) 재산권과 상속권 제한, 독신세, 공직 진출 제한 등 강력한 조치”를 강조했다. 그런가 하면 한 연구자는 최근 진보 성향 신문 칼럼에서 “돈을 더 주면 출산율이 올라갈 거라는 ‘헝가리 솔루션’은 국가가 국민을 자극에 반응하는 가축으로 본다는 증거”라며 확실한 해법은 “출산, 인구에 집착 말고 국가가 개인의 고통에 귀 기울이고 각자의 행복을 응원하고 있다고 느끼게 하는 것”이라고 했다. 같은 신문에는 며칠 후 “차라리 저출생 대책이란 말이 없어지면 좋겠다”며 “서로 존중하는 삶, 좋은 세상을 만드는 게 우선”이란 칼럼도 실렸다. 전자는 최근 일부 보수 진영에서 나오는 주장인데 여성의 사회 진출이 어려워지면 예전처럼 가정에 머물며 아이를 양육할 걸로 보는 듯하다. 하지만 이는 지금의 한국 사회에서 현실적이지 않을뿐더러 국민의 자아 실현을 뒷받침하는 게 국가의 책무라는 점에서 바람직하지도 않다. 후자는 일부 진보 진영에서 나오는데 저출산 대책이 여성을 수단화·대상화한다는 거부감에서 비롯된 듯하다. 하지만 ‘청년들의 극단 선택을 막으려면 청년이 행복한 나라를 만들어야지 마포대교 난간을 높이거나 순찰을 강화하는 건 도움이 안 된다’는 말처럼 듣기엔 그럴듯하지만 정책적으로는 별 도움이 안 된다. 또 현금성 지원이 출산율에 영향을 준다는 걸 부정하는 전문가는 없다. 다만 금액이 늘어난다고 효과가 비례하는 건 아니고, 장기적이기보다 단기적 효과란 지적이 있을 뿐이다. 대부분의 전문가들이 말하는 저출산 해법은 비슷하다. 출산·육아 부담 경감, 일-가정 양립 지원, 주거 보장, 이민자 유치 등이다. 이는 해외에서 검증된 방법들이기도 하다. 한국에서 안 통한 건 집값 급등 등 다른 변수가 개입된 데다, 심리적 불안을 극복하고 아이를 낳을 정도로 충분히 자원을 배분하지 않아서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저출산 예산 중 주택 융자 등을 뺀 순수 가족 관련 정부 지출은 한국이 국내총생산(GDP)의 1.4%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평균(2.2%)의 3분의 2 정도다. 한 전문가는 “돈을 써도 해결되지 않는다고 돈을 안 쓰는 게 저출산 해법일 순 없다”며 “더 많이, 효과적으로 쓰는 방법을 연구해야 한다”고 했다. 저출산 위기를 극복하려면 정공법을 택하되 지원 규모를 늘리고 선택과 집중을 강화해야 한다. 미혼 남녀, 첫째를 안 낳는 부부, 둘째를 안 낳는 부부 등으로 구분한 뒤 우선순위를 정하고 맞춤형 정책을 시행하는 게 그 시작일 것이다. 장원재 정책사회부장 peacechaos@donga.com}

    • 2024-0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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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장원재]여권 대선주자가 인구 부총리 맡아라

    윤석열 대통령은 1일 신년사에서 저출산 문제를 두고 “시간이 많이 남지 않은 만큼 지금까지와는 다른 차원의 접근이 필요하다”고 했다. 이를 보며 7년 전 문재인 전 대통령이 취임 직후 국가재정전략회의를 열며 저출산 문제에 대해 “모든 국가적 노력을 다해야 할 상황”이라고 했던 게 떠올랐다. 문재인 정부는 합계출산율 1.4명이란 목표를 제시했지만 임기 중 출산율은 2017년 1.05명에서 2022년 0.78명으로 떨어졌다. 2000년대 초반 이후 출산율이 지속적으로 하락했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신생아 수는 계속 줄었지만 2002년 합계출산율은 1.178명으로 2016년(1.172명)과 비슷한 수준이었다. 출산율 하락이 본격화된 건 집값이 급등하기 시작한 2017년경부터였다. 주거 불안이 성장률 하락 및 고용 불안과 맞물리며 저출산을 가속화시킨 것이다. 현재 한국의 합계출산율은 1990년 통일 이후 미혼 여성이 대거 유출됐던 동독 지역(0.77명)과 비슷한 수준이다. 말 그대로 ‘재앙적 상황’인 만큼 윤 대통령이 언급한 ‘차원이 다른 접근’의 필요성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다. 문제는 방식이다. 저출산 대책과 관련한 다른 오해 중 하나는 저출산 대책의 컨트롤 타워가 보건복지부란 것이다. 하지만 청년 및 신혼부부 주거 보장은 국토교통부, 일-가정 양립 지원은 고용노동부, 사교육비 대책은 교육부, 여성 및 청소년 대책은 여성가족부에서 한다. 그리고 범정부 컨트롤 타워는 대통령 직속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저고위)가 맡고 있다. 문제는 저고위에 예산 편성권이 없고, 각 부처의 이해관계를 조율할 정무적 파워도 없다는 것이다. 위원장은 윤 대통령이지만 취임 후 회의를 직접 주재한 건 한 번뿐이다. 한 정부 관계자는 “장관급인 김영미 부위원장은 손꼽히는 전문가다. 또 열심히 하지만 나경원 전 부위원장과는 정치적 위상이 다르다 보니 각 부처 협조가 잘 안 된다고 들었다”고 했다. ‘모두의 책임은 결국 누구의 책임도 아니다’란 말이 있다. 국민의힘에서 1호 공약으로 저출산 대책을 발표하며 ‘부총리가 장관을 맡는 인구부 신설’을 밝힌 것도 확실한 주무부처가 필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일본도 지난해 4월 저출산 대책을 총괄하는 ‘어린이가족청’을 만들었다. 이왕 ‘차원이 다른 접근’을 하겠다면 차기 대선주자인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에게 총선 후 인구부 장관 겸 부총리를 맡기는 건 어떨까. 이미 총선 불출마 의사를 밝힌 한 위원장이 명운을 걸고 저출산 문제 해결에 나서겠다면 야당도 강하게 반대하지 못할 것이다. 최근 불거진 대통령실과의 갈등 때문에 어렵다면 다른 대선주자도 상관없다. 여권 대선주자가 내각에서 총대를 메고 나서야 다른 장관들의 협조를 얻으며 정부 내 자원을 총동원할 수 있다. 정부가 총력을 기울인다면 출산율 반등은 충분히 가능하다. 본보 기자들이 신년기획 ‘출산율, 다시 1.0대로’ 취재를 위해 둘러본 프랑스, 스웨덴, 독일, 헝가리, 체코, 일본 등은 모두 합계출산율 1.0명대 초중반에서 반등에 성공했다. 반등에 성공하지 못하고 1.0명 아래로 추락한 나라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한국밖에 없다. 이제 70여 일 남은 총선이 끝나면 저출산 문제를 해결할 진짜 마지막 기회가 찾아온다. 윤 대통령이 어떤 ‘차원이 다른 접근’을 할지 국민들은 지켜보고 있다.장원재 정책사회부장 peacechaos@donga.com}

    • 2024-0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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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장원재]서울대병원이 침묵한 대가

    필자는 2006년 5월 사회부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당시 한나라당 대표) 피습 사건을 취재했다. 휴일이었던 토요일(5월 20일) 저녁 같은 팀 기자들과 저녁을 먹다 오후 7시 20분경 피습 소식을 듣고 황급히 달려갔던 기억이 생생하다. 서울 서대문구 신촌 현대백화점 앞에서 공격당한 박 전 대표는 즉각 신촌 세브란스병원 응급실로 이송됐고, 오후 9시 15분경부터 2시간가량 수술을 받았다. 박창일 세브란스병원장과 수술을 집도한 성형외과 탁관철 교수는 수술 직후인 오후 11시 40분경 카메라 앞에 섰다. 이 자리에서 “예리한 흉기로 11cm 자상을 입었으며 상처가 0.5cm만 더 깊었다면 위험했을 것”이란 소견을 밝혔다. 피곤한 표정이었음에도 자정이 넘을 때까지 취재진 질문 20여 개에 답하고 자리를 떴다. 이달 2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 피습 소식을 듣고 당시 기억이 되살아났다. 현직 야당 대표가 공격당했다는 점은 같았지만 피습 직후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등에 괴담이 급속도로 확산된 건 18년 전과 다른 모습이었다. SNS 보급과 극단주의 확산의 영향이겠지만 괴담이 퍼지는 것에 제동을 걸 기회는 있었다는 생각이다. 이 대표 수술 직후 서울대병원 집도의가 직접 이 대표의 상처와 흉기, 상태를 설명했다면 어땠을까. 하지만 서울대병원은 이 대표 수술 이후 41시간 반 동안 침묵을 지켰다. 수술 당일 출입기자단에 브리핑을 예고했다가 1시간 40분 만에 취소하기도 했다. 결국 언론은 민주당 브리핑 등에 의존해 이 대표 상태를 전해야 했다. 현장에선 혼선이 난무했다. 민주당은 ‘내경정맥’을 ‘뇌경정맥’으로 공지했다가 번복했고, ‘내경정맥 60%가량이 손상됐다’고 했다가 철회했다(이후 다시 맞다고 했다). ‘1cm 열상(피부가 찢겨 생긴 상처)’은 허위정보라며 ‘2cm 창상(칼, 창 등에 의해 다친 상처)’로 불러달라고도 했다. 그러는 동안 일부 극우 유튜버를 중심으로 ‘자작극 아니냐’는 음모론도 확산됐다. 길어지는 침묵에 비판이 확산되자 서울대병원은 4일 오전에야 브리핑을 갖고 이 대표의 상처를 ‘1.4cm 자상’으로 정리했다. 또 “기도 손상이나 내경동맥 손상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었고 난도 높은 수술이었다”는 입장을 밝혔지만 질문에는 일절 답하지 않고 자리를 떴다. 서울대병원 측은 브리핑이 늦어진 이유를 “의료법·개인정보보호법에 따라 환자 동의 없이 의료 정보를 발표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하지만 전날 민주당이 서울대병원을 향해 “정권 눈치를 보느라 브리핑을 안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던 걸 감안하면 이 대표 측 동의가 없어 브리핑이 늦어졌다는 설명은 납득하기 어렵다. 또 질문을 받지 않은 이유와 10일 퇴원 때까지 추가 브리핑이 없었던 이유에 대해 서울대병원은 뚜렷한 설명을 내놓지 않고 있다. 의료계에선 서울대병원 집행부가 교육부 산하 공공기관이란 입장 때문에 여야 눈치를 보다 침묵을 지키기로 했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하지만 서울대병원의 침묵은 본의든 아니든 일방적 주장과 음모론 확산에 기여했다.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 연구에 따르면 SNS 보급으로 허위정보는 팩트보다 6배나 빠르게 퍼진다고 한다. 그리고 허위정보의 해악을 막을 가장 빠른 방법 중 하나는 신뢰할 만한 전문가가 직접 진실을 밝히는 것이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때 많은 전문가들이 언론에 나섰던 것처럼 말이다. 그런 점에서 이번 피습 때 서울대병원의 침묵은 두고두고 반면교사로 남아야 한다는 생각이다.장원재 정책사회부장 peacechaos@donga.com}

    • 2024-0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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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새해, 작은 학교의 건투를 빈다 [오늘과 내일/장원재]

    “우다다다 친구들과 다니면서 학교를 느낄 수 있는 우리 학교 복도가 좋아.”(‘복도’) “선생님은 불쌍해. 우리가 말을 너무 안 듣는대. 그래도 괜찮아요. 저희가 있잖아요.”(‘불쌍한 선생님’) 전북 부안군 백련초에서 최근 내놓은 책 ‘코딱지’는 최근 읽은 가장 마음 아픈 책이었다. 내용 자체는 전혀 슬프지 않았음에도 그랬다. 이 책은 이달 5일 폐교를 앞두고 재학생 8명에게 마지막 추억을 주기 위해 교직원들이 재학생들의 시와 그림을 묶은 것이다. 재학생 8명은 새 학기에 인근 하서초를 다니게 된다. 폐교는 재학생과 교사는 물론 지역 주민, 졸업생에게도 안타까운 일이다. 학교가 사라지면 청년층 정착이 힘들다 보니 지역 소멸을 가속화시키는 계기도 된다. 또 농어촌에서 학교는 단순한 교육 기관이 아니라 투표, 축제 등이 진행되는 구심적이다. 구심점이 사라진 지역사회는 활기를 유지하며 미래를 꿈꾸기 어려워진다. 그렇다면 폐교를 막을 방법은 없을까. 한 가지 방법은 학생이 있건 없건 폐교를 안 하는 것이다. 전북에선 ‘작은 학교 살리기’를 내건 교육감들이 학생 한 명도 없는 ‘유령 학교’라도 문을 닫지 않았다. 그 결과 최근 5년(2019∼2023년) 폐교 수는 5곳으로 인접한 전남(19곳), 경남(17곳), 충북(19곳), 충남(10곳)보다 훨씬 낮다. 문제는 지속가능하지 않다는 것이다. 결국 전북은 올해 한꺼번에 학교 9곳(초교 7곳, 중학교 2곳)의 문을 닫기로 했다. 올해 전남 경남 충북 충남을 합친 폐교 수(6곳)보다 많다. 두 번째는 주거지 제공 등 파격적 혜택을 제시하며 학생을 유치하는 것이다. 전남 신안군 홍도분교는 지난해 6학년 3명뿐이어서 올해 재학생 ‘0명’ 위기에 놓였다가 전학생과 신입생 10명을 유치해 폐교 위기에서 벗어났다. 그 대신 신안군은 입학·전학하는 학생과 학부모에게 방 2개 이상의 숙소와 월급 320만 원을 보장하는 일자리를 제공하기로 했다. 아동당 연간 80만 원의 햇빛아동수당도 약속했다. 마지막은 학생이 찾아올 정도로 매력적인 학교와 마을을 만드는 것이다. 경남 함양군 서하초의 경우 2019년 ‘학생모심위원회’를 만들고 학부모에게 주거지와 일자리를 제공하는 것은 물론 원어민 영어 교육, 일부 과목 영어 수업, 전교생 해외연수 등 파격적 조건을 내걸어 학생 수를 2020년 10명에서 지난해 24명으로 늘렸다. 신귀자 교장의 열정, 졸업생과 지역주민의 성원, 한국토지주택공사(LH)의 주택 지원, 지역 기업의 학부모 채용 약속 등이 결합돼 폐교 위기를 벗어난 것이다. 폐교를 막는 세 방법 중 첫째는 미봉책이고 둘째도 지속가능성은 의문이다. 세 번째야말로 폐교를 막고 지역을 살리는 상책이다. 서하초를 주제로 책 ‘시골을 살리는 작은 학교’를 쓴 김지원 씨는 “서하초의 경우 학교 살리기가 스마트팜과 창업 플랫폼 구축 등으로 이어지며 지역 살리기로까지 연결된 드문 케이스”라고 했다. 다만 김 씨는 “모든 학교가 서하초 모델을 따라 할 순 없고 그렇게 하는 게 바람직하지도 않다”고 했다. 수도권 집중과 학령인구 절벽이라는 거대한 흐름 속에서 무조건 폐교는 안 된다고 고집할 시기는 지났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서하초 사례는 폐교를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대신 교직원과 졸업생, 지역주민의 열정으로 ‘기적’을 만들 수 있다는 걸 보여준 사례다. 새해 첫날 서하초 얘기를 하는 건 올 한 해 포기하지 않고 노력하면 놀라운 일이 생길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작은 학교들의 건투를 빈다. 장원재 정책사회부장 peacechaos@donga.com}

    • 2023-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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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설을 쓴 건 누구인가 [오늘과 내일/장원재]

    지난해 11월 8일 검찰은 김용 전 민주연구원 부원장을 정치자금법 위반 혐의로 구속 기소하면서 “대장동 개발 과정에서 (민간업자들과) 유착관계를 맺고 금품 제공과 선거 지원에 따른 사업상 특혜를 주고받았다”고 했다. 김 전 부원장은 “(검찰이) 창작 소설을 쓰고 있다. 절필시키고 반드시 진실을 밝히겠다”고 맞받았다. 열흘 후 정진상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실 정무조정실장 구속영장실질심사에서 검찰이 “대장동 업자들에게 특혜를 몰아주고 수익을 뇌물로 받았다”고 했을 때도 정 전 실장 측은 “유동규 전 성남도시개발공사 사장 직무대리 등의 진술에 의존한 완벽한 소설”이라고 반박했다. 당시 이재명 민주당 대표의 반응도 비슷했다. 이 대표는 정 전 실장 뇌물 수수 의혹을 두고 “검찰이 훌륭한 소설가가 되긴 쉽지 않겠다. 창작 완성도가 매우 낮은 것 같다”고 했다. 하지만 지난달 30일 선고된 김 전 부원장 1심 판결에서는 김 전 부원장과 민주당 측이 소설이라며 부인했던 내용이 상당수 인정됐다. 첫째,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김 전 부원장이 정 전 실장 및 유 전 직무대리와 “이 대표의 정치적 성공을 바라는 동지이자 의형제라 할 정도로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고 했다. 유 전 직무대리는 물론 정 전 실장과도 “친분 관계일 뿐 의형제는 아니었다”고 한 김 전 부원장의 발언과 거리가 있는 대목이다. 둘째, 김 전 부원장 측은 검찰이 돈을 받았다고 지목한 2021년 5월 3일 “다른 곳에 있었다”며 전직 경기도 공공기관 대표 증언을 알리바이로 제시했지만 재판부는 “믿기 어렵다”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대신 그날 유원홀딩스 사무실에서 1억 원을 건넸다는 유 전 직무대리 증언을 인정했다. 셋째, 재판부는 2021년 6월 8일 경기 수원시 광교 버스정류장에서 3억 원을 전달하고 6, 7월 2억 원을 더 건넸다는 유 전 직무대리의 진술도 인정했다. 김 전 부원장 측은 “날짜가 오락가락한다”며 이의를 제기했지만 재판부는 “다소의 차이는 비본질적”이라며 일축했다. 넷째, 유 전 직무대리의 진술이 검찰의 회유·압박으로 이뤄져 신빙성이 낮다는 김 전 부원장 측 주장에 대해서도 재판부는 “검사의 협박·회유 등이 행해졌다고 볼 사정은 안 보인다”고 했다. 다섯째, 김 전 부원장 측은 “정치자금을 받았다는 시기는 이미 전국 조직 완성 후였고 그 준비 과정 역시 자원봉사자가 갹출했다”고 했지만 재판부는 “경선 대비 문건 등을 볼 때 자원봉사로 해결될 정도가 아니었다”며 “조직 구성과 준비 등을 위한 자금 필요가 있었다”고 했다. 판결 후 이 대표는 “아직 재판이 끝난 게 아니다”라고 했다. 하지만 1심에서 범죄사실이 대부분 인정된 이상 경천동지할 새 증거가 없다면 2, 3심에서 무죄가 선고되긴 힘들다는 게 법조계의 상식이다. 특히 정진상-김용-유동규 및 대장동 일당의 유착 관계(첫째)와 유 전 직무대리 진술의 신빙성(둘째∼넷째)이 인정된 건 이 대표와 민주당에 뼈아픈 대목이다. 진행 중인 정 전 실장 및 이 대표 재판에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돌아보면 이 대표와 민주당은 대장동 의혹에 대해 제대로 설명하기보다 ‘소설’, ‘야당 탄압’, ‘정치 보복’이란 구호로 일관했다. 잘 모르기 때문일 수도 있고, 알고 싶지 않아서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번 판결로 이 대표가 스스로 ‘분신’이라고 했던 측근의 일탈이 드러났다. 이 대표는 이제라도 대장동 의혹에 대해 아는 만큼 설명하고, 측근 관리를 제대로 못했던 것에 유감이라도 표해야 한다. 그게 2년 넘게 이어진 대장동 스캔들로 분노하거나 실망했던 국민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다.장원재 사회부장 peacechaos@donga.com}

    • 2023-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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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장원재]시장은 구청장이 되고 싶을까

    최근 만난 서울의 한 현직 구청장은 “서울과 인접한 경기 기초단체장들이 서울시에 편입하겠다고들 하는데 속마음은 그러고 싶지 않을 것”이라며 “주민 표심을 고려한 오버 액션”이라고 했다. 이유를 묻자 시장 권한이 구청장보다 훨씬 크기 때문이란 답이 돌아왔다. 실제로 지방자치법을 보면 시장은 도시계획을 수립하고 재개발을 진행할 권한이 있지만 구청장은 그렇지 않다. 상하수도를 만들거나 도시공원을 만들 권한도 시장에겐 있지만 구청장에겐 없다. 경기 성남시장이 대장동 사업을 주도할 순 있지만, 서울 용산구청장이 용산정비창 사업을 주도할 수 없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렇게 시장은 행사할 수 있지만 구청장은 행사할 수 없는 권한이 42개나 된다. 지금까지 지자체장이 서울 편입론에 긍정적 태도를 보인 곳은 김포·구리·고양시 정도다. 그런데 시장직을 포기할 수 있다고 밝힌 사람은 김병수 김포시장뿐이다. 김포시의 경우 서울과 인천 사이에 끼어 있다. 또 김동연 경기지사의 경기북부특별자치도 구상이 현실화되면 한강 남쪽임에도 경기북도로 가든가, 서울 인천 경기북도에 둘러싸여 섬처럼 남아야 한다. 김포에 사는 지인은 “서울에 편입된다고 크게 달라질 건 없겠지만 경기북도나 경기남도, 인천이 되는 것보단 낫다”고 했다. 결국 김 시장은 이달 6일 오세훈 서울시장과 만나 “시장 권한을 내려놓을 수 있다”고 했다. 반면 백경현 구리시장은 이달 13일 오 시장을 만나 “특별자치시 형태로 편입을 희망한다”고 했다. 서울 편입은 원하지만 시장 권한을 포기하진 않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서울시는 일정 기간은 자치시를 유지할 수 있지만 6∼10년 후엔 자치구로 완전히 편입돼야 한다는 입장이다. 고양시는 인구 100만 명 이상인 특례시로 시장이 지방연구원을 만들 수 있고, 택지개발지구 지정도 가능하다. 주민 수가 서울 자치구 중 가장 많은 송파구(약 65만 명)의 1.6배여서 자치구 하나로 편입되긴 규모가 지나치게 크다. 이동환 고양시장이 이달 21일 오 시장을 만나 “종속적 편입이 아니라 대등하게 수도권 재편을 논의하자”고 한 것도 단순 편입에는 관심이 없다는 뜻이다. 이처럼 서울 편입에 긍정적인 기초단체에서도 각자 생각하는 ‘메가시티 서울’의 청사진은 다르고 이해관계도 다르다. 또 서울 인접 경기 기초단체 중 김포·구리·고양시를 제외한 9곳 단체장들은 일부 주민의 편입 주장에도 유보적이거나 부정적인 태도를 유지하고 있다. 각자 사정이 다른 건 시야를 전국으로 넓혀도 마찬가지다. 최근 여권에서 거론하는 부산-경남 행정 통합은 지난해 10월 부울경 메가시티 추진이 공식 무산된 직후 부산·경남 지자체장이 밝혔던 구상이다. 당시 “주민 의견을 수렴해 진행하겠다”고 했는데 최근 주민 여론조사에서 10%포인트 차이로 부정적 의견이 더 많았다. 주민 투표 방식으로 통합을 진행할 경우 통과를 장담하기 어렵단 뜻이다. 대전·세종·충남북 등 충청권 통합은 지난해 지방선거에서 일제히 국민의힘 소속 단체장들이 당선되며 힘을 얻기 시작했다. 하지만 세종시는 충청권 메가시티보다 명실상부한 ‘행정수도’ 위상 정립에 관심이 더 많다. 최근 4개 광역지자체 시도의회에서 충청권 초광역의회 구성을 위해 만났다가 의원 배분 방식에서 이견을 드러내는 등 주도권 경쟁도 만만치 않다. 메가시티가 세계적 흐름인 건 맞고, 통합을 통해 시너지를 낼 수 있다는 말에도 타당한 측면이 있다. 하지만 지자체의 개별적 상황과 지역 주민들 의사를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채 ‘닥치고 메가시티’를 외치는 건 공허하고, 그래서 총선용이란 지적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장원재 사회부장 peacechaos@donga.com}

    • 2023-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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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장원재]공수처가 잘하면 나라가 망하나

    지난달 19일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 국감에선 김진욱 처장 자리에 붙은 포스트잇 하나가 카메라에 잡혔다. ‘장차관 수십 명 기소하면 나라 망한다’는 내용이었다. 여야 공히 공수처 실적이 부진하단 지적을 쏟아내다 보니 실무진에서 억지 대응 논리를 만들었구나 싶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여운국 차장이 직접 작성해 붙인 메모라고 했다. 또 김 처장은 실제로 국감장에서 “공수처가 일을 잘하면 나라가 안 돌아간다”고 했다. 김 처장과 여 차장은 2021년 1월 임명된 공수처 초대 처·차장으로 곧 3년 임기를 마친다. 그런데 사석도 아니고 국회에서 ‘월급은 받지만 일은 안 하겠다’는 논리를 펴는 걸 보고 저런 생각으로 잘도 조직을 운영해 왔구나 싶었다. 같은 논리라면 감사원이 일을 잘하면 정부가 안 돌아가고, 금융감독원이 일을 잘하면 금융권이 마비되니 둘 다 너무 열심히 일하면 안 된다. 연간 200억 원의 예산이 배정된 공수처의 역할은 권력을 견제하고 고위공직자 범죄를 엄정하게 수사하는 것이다. 그런데 실적은 초라하기만 하다. 출범 후 2년 8개월 동안 직접 기소는 3건, 공소제기 요구는 4건뿐이다. 청구한 체포영장 5건, 구속영장 3건은 모두 기각됐다. 해외 유사기관과 비교해도 부진한 실적이다. 공수처의 롤모델인 홍콩의 염정공서(ICAC)는 2021년 200명을 기소했고, 싱가포르의 탐오조사국(CPIB)은 같은 해 165명을 기소했다. 또 그해 두 기관의 기소 사건 유죄판결 비율은 70∼90% 수준이었다. 인구도 적은 홍콩과 싱가포르가 한국보다 더 부패해 그런 건 아닐 것이다. 김 처장은 실적 부진이 인력 부족 때문이라고 했다. 하지만 신규 조직은 원래 초반에 작게 시작해 성과를 내며 몸집을 키우는 법이다. CPIB는 1960년 설립 직후 인원이 8명뿐이었다. 공수처는 지난해 말 기준으로 74명이다. 문제는 사람이다. 신규 조직일수록 역량과 의지가 있는 리더가 기틀을 잡아야 하는데 김 처장과 여 차장 모두 판사 출신으로 수사 경험이 없다. 또 김 처장은 황제 조사, 통신자료 조회 논란 등을 자초했으며 시무식에서 찬송가를 부르다 소리 내 우는 언행 등으로 여러 차례 도마에 올랐다. 3년 전으로 시계를 돌려 보면 국회에서 추천한 초대 처장 후보는 검찰 출신으로 당시 국민권익위원회 부패방지 부위원장을 지내던 이건리 변호사와 김 처장, 이렇게 둘이었다. 문재인 전 대통령은 김 처장을 택했는데 ‘검찰 출신이 아니기 때문’이란 해석이 지배적이었다. 문 전 대통령은 당선 전 “대한민국 주류를 교체하고 싶다”고 했다. 그러다 보니 취임 후 일의 본질을 모르는 인물을 발탁하는 일이 반복됐다. 법원 행정을 모르는 김명수 전 대법원장을 임명해 재판 지연 문제를 심화시켰고, 부동산을 모르는 김현미 전 국토교통부 장관을 임명해 집값대란을 자초했다. 수사기관의 장으로 수사 경험이 없는 인물을 임명한 것도 ‘주류 검찰을 견제해야 한다’는 생각이 앞섰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김 처장은 임기 내내 언론 탓, 검찰 탓을 하며 실적 부진의 원인을 외부로 돌리다 최근에야 “수사가 이렇게 어려운지 이제 알았다”고 주변에 털어놨다고 한다. 그동안 의욕을 보였던 이들은 조직을 떠났고, 공수처는 ‘법조인의 무덤’으로 불리게 됐다. 지금 상태라면 김 처장 임기가 끝나고 수장 공백 사태가 빚어져도 우려할 국민은 많지 않을 것 같다. 시간이 다소 걸리더라도 다음 공수처장은 누구나 고개를 끄덕일 인물을 찾아 임명해야 한다. 대놓고 ‘일 안 하고 월급은 받겠다’는 고위공직자를 더 참아줄 국민은 없을 것이다. 장원재 사회부장 peacechaos@donga.com}

    • 2023-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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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장원재]전원일치 판결로 사회를 바꿔야 하는 이유

    1974년 7월 미국 연방대법원은 리처드 닉슨 대통령에게 워터게이트 스캔들 관련 녹음테이프를 제출하라고 판결했다. 닉슨 대통령은 소식을 들은 뒤 먼저 “전원일치냐”고 물었다. 보좌관이 “그렇다”고 하자 저항을 포기하고 17일 후 사임했다. 워터게이트 특종 주역인 워싱턴포스트의 밥 우드워드 기자는 미 연방대법원에 대해 쓴 ‘지혜의 아홉 기둥’에서 당시 판결 과정을 다뤘다. 그때 연방대법원에는 워런 버거 대법원장을 포함해 닉슨 대통령이 지명한 대법관이 4명 있었다. 하지만 설득과 합의, 절충 끝에 모두가 동의한 판결문이 나왔다. 우드워드 기자는 “(닉슨은) 반대의견 하나는 있을 걸로 믿었다”고 썼다. 버거 대법원장의 전임자는 얼 워런 전 대법원장이었다. 그는 병상에서 후배 대법관에게 워터게이트 선고를 물었고 “전원일치로 닉슨이 패소했다”는 말을 듣고 안도한 후 당일 세상을 떠났다. 워런 전 대법원장은 1954년 공립학교의 인종 분리는 위헌이란 ‘브라운 판결’로 1960년대 민권운동의 토대를 마련한 인물이다. 당시 그는 “만장일치가 아니면 남부가 승복하지 않을 것”이라며 첨예하게 나뉜 대법관들의 의견을 조율해 전원일치 판결을 이끌었다. 워터게이트 판결과 브라운 판결은 최고 법원에서 내려진 전원일치 판결의 무게를 보여주는 사례다. 한국 대법원에서 통상적인 재판은 대법관 4명으로 구성된 소부(小部)가 담당한다. 소부에서 합의가 안 되거나 사회적으로 의미가 큰 사건만 대법관 13명으로 구성된 전원합의체(전합)가 맡는다. 전합 재판장은 대법원장이다. 전합 판결은 높은 법적 권위를 갖고 우리 사회가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방향을 제시하는 역할을 한다. 현재 대법원장 공백 사태에서 전합 개최 가능 여부가 논란이 된 것도 그 막중한 무게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 동아일보가 김명수 전 대법원장 재임 6년간 나온 전합 판결을 전수조사한 결과 전원일치 판결은 14.7%에 불과했다. 이용훈 사법부(36.8%), 양승태 사법부(33.6%)의 절반에도 못 미쳤다. 물론 대법관 간 의견은 얼마든 다를 수 있다. 다양한 목소리도 필요하다. 일본처럼 최고재판소 결정 대부분이 전원일치인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 하지만 대법원이 사회적 갈등과 분쟁의 법적인 최종 해결을 담당한다는 걸 감안하면 설득과 토론, 타협으로 하나의 결론에 도달하려는 노력은 중요하다. 참고로 미 연방대법원의 1946∼2009년 판결 중 전원일치 비중은 30%가량이다. 법조계 관계자는 “과거엔 대법관들이 토론과 설득 과정에서 처음 가졌던 입장을 변경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입장을 잘 바꾸지 않는다”고 했다. 그만큼 대법관들이 양극화됐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7 대 6처럼 패소한 쪽이 승복하기 쉽지 않은 판결이 되풀이되고 있다. 2019년 11월 이승만 박정희 전 대통령을 비방한 다큐멘터리 ‘백년전쟁’에 대한 방송통신위원회 제재가 정당한지 심의할 때도 막판에 김 전 대법원장이 진보 성향 대법관들의 손을 들어 7 대 6 판결이 나왔다. 사회적·역사적으로 중요한 판결일수록 전원일치로 결정해야 갈등과 분열의 여지를 줄일 수 있다는 점에서 아쉬운 대목이다. 민일영 전 대법관은 퇴임 후 학술대회에서 미국 사례를 들며 “대법관들이 정치적 진영에 따라 자동판매기 같은 5 대 4 판결을 되풀이하면 사회 분쟁과 이념 갈등을 해결하는 올바른 방향을 제시하지 못하게 된다”고 했다. 다음 대법원장이 누가 되든 전합을 운영할 때 새겨야 할 지적일 것이다.장원재 사회부장 peacechaos@donga.com}

    • 2023-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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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장원재]김명수 대법원장이 218번 강조한 ‘좋은 재판’

    “김명수 대법원에선 빨리 사건을 처리하라고 압박하는 일이 사라졌다. 오히려 야근을 하거나 사건을 많이 처리하는 판사들이 같이 일하기 힘들어할까 봐 배석판사나 법원 직원들 눈치를 봐야 하는 상황이 됐다.” 지방의 한 부장판사는 김명수 대법원 6년 동안 달라진 게 있는지 묻자 이렇게 답했다. 야근이 줄고 일하기 좋은 법원이 됐다고도 했다. 그런데 그게 과연 국민들에게 좋은 걸까. 대법원 홈페이지에 따르면 김명수 대법원장은 취임 후 공개석상에서 연설을 91차례 했다. 여러분, 국민 등 의례적 단어를 빼면 가장 많이 사용한 단어는 ‘좋은 재판’이었다. 무려 218번 나왔는데 이는 연설당 2.4회다. 그렇게 입이 닳도록 강조한 ‘좋은 재판’은 뭘까. 김 대법원장은 한마디로 ‘양질의 재판’이고 ‘국민을 중심에 둔 재판’이라고 했다. 또 임기 초 판사들에게 “재판은 계량화된 수치로만 평가할 수 없다. 속도에만 지나치게 매달리지 말고 재판의 질적 수준을 끌어올려 달라”고 주문했다. 좋은 재판의 토대는 ‘좋은 법원’이라고도 했다. “구성원이 즐겁고 넉넉한 마음으로 업무에 임할 때 국민 만족이 높아지고 사법부에 대한 신뢰가 향상된다”는 논리였다. 그런데 ‘속도에 매달리지 않을 것’과 ‘즐겁고 넉넉한 마음’을 주문한 결과는 재판 지연으로 이어졌다. 그런데 헌법 27조는 국민에게 ‘신속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보장한다. ‘신속함’은 공개성 등과 함께 헌법에서 규정한 몇 안 되는 재판의 요건이다. 김 대법원장은 좋은 재판의 요건으로 투명하고 공정할 것, 적정하고 충실할 것, 쉽고 편안할 것 등을 강조했지만 정작 이런 내용은 헌법에 없다. 재판 지연은 법관 3000여 명, 법원 직원 1만5000여 명을 관리하는 관리자가 계량화를 등한시한 대가이기도 했다. 김 대법원장이 강조한 적정성과 충실성, 투명성과 공정성 등은 듣기에 그럴듯하지만 추상적이고 자의적이어서 평가의 잣대로 삼기 어렵다. 이런 지적에 김 대법원장은 여러 차례 “어떤 재판이 좋은 재판인지는 국민만이 온전히 평가할 수 있다”고 했다. “측정할 수 없다면 관리할 수 없고, 관리할 수 없으면 개선할 수 없다”는 조직운영의 상식과 정반대였다. 결국 그가 6년 내내 강조한 ‘좋은 재판’이 어떤 건지, 어느 정도 실현되는지 법원 내부에서 누구도 답하기 어려운 상태가 됐다. 법원 일각에선 ‘어쩔 수 없었을 것’이란 옹호론도 나온다. 사법농단 논란 국면에서 임명된 대법원장이다 보니 재판 개입 논란을 피하는 게 우선이었고, 그러다 보니 일부 판사들의 태업과 도 넘은 언행에도 개입하기 어려웠을 것이란 취지다. 하지만 재판 개입과 관리자의 적법한 관리는 전혀 다르다. 헌법은 “법관은 헌법과 법률에 의해 양심에 따라 독립해 심판한다”고 규정했다. 하지만 그게 관리자의 당연한 역할을 포기하는 근거가 될 순 없다. 김 대법원장은 취임사에서 좋은 재판에 대해 “독립된 법관이 공정하고 충실한 심리로 정의로운 결론에 이르는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올 초 신년사에선 “독립된 법관이 충실한 심리를 통해 적시에 정의로운 결론에 이르는 것”이라며 ‘적시성’을 강조했다. 임기 마지막에야 좋은 재판에 대한 견해를 바꾼 것이다. 22일 퇴임식에서도 재판 지연을 거론하며 “국민의 기대에 못 미쳤다는 점을 받아들인다”며 고개를 숙였다. 김 대법원장 임기가 24일 끝나는 만큼 이제 공은 다음 대법원장에게 넘어갔다. 다음 대법원장이 정당한 관리자의 역할을 하면서 헌법에 명시된 ‘신속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국민들에게 돌려주길 기대한다. 장원재 사회부장 peacechaos@donga.com}

    • 2023-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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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장원재]기피시설 없는 지자체들

    충청권에선 지난해 6·1지방선거 때 증평군수 선거가 화제가 됐다. 유명 배우 출신인 국민의힘 송기윤 후보가 부군수를 지낸 더불어민주당 이재영 후보에게 301표, 불과 1.8%포인트 차이로 패한 것이다. 당선 가능성 설문조사에서 한때 15%포인트 가까이 앞질렀던 송 후보의 패인을 두고 지역사회에선 ‘군부대 이전 공약 때문’이란 말이 나왔다. 송 후보는 출마할 때 “증평에 있는 육군 37보병사단을 이전하고 그 자리에 대기업을 유치하겠다”는 공약을 내세웠다. 송 후보가 간과했던 건 수도권에서 ‘기피시설’인 군부대가 지역사회에선 ‘필수시설’이란 것이었다. 상대 후보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군부대와 군인 가족은 지역 버팀목이자 상공인 경제를 살리는 축이다. 오히려 군악대 축제를 유치해 명품 군사도시로 발전시키겠다”며 역공을 펴 판세를 뒤집었다. 필자에게 이 얘기를 전해 준 중앙부처 고위 공직자는 “전국 지자체 상당수는 이제 기피시설이 없다”고 했다. 기피시설을 두지 않을 만큼 힘 있는 지자체가 많다는 뜻이 아니다. 반대로 소멸 위기에서 어떤 시설이든 유치해야 하는,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닌 다급한 지자체가 늘고 있다는 뜻이다. 소멸 위기에 처한 지자체에 군부대는 ‘가뭄의 단비’이기도 하다. 지난해 말 대구시가 군부대 통합 이전 방침을 밝히자 경북 상주·영천시와 칠곡·군위·의성군 등 무려 5개 지자체가 유치 경쟁에 뛰어들었다. 이 중 4곳이 행정안전부가 지정한 인구 감소 지역이다. 강원도 접경 지자체도 최근 인구 감소 때문에 통폐합이 진행 중인 군부대 지키기에 사활을 걸고 있다. ‘X사단과 계속 함께하고 싶다’는 주민들의 손팻말이 군부대 철조망을 장식할 정도다. 대표적 기피시설로 꼽히는 교도소나 소각장도 마찬가지다. 경북 청송군은 여자교도소 유치를 위해 법무부를 설득 중이고, 강원 태백시와 전북 남원시도 교도소 건립을 확정했거나 추진 중이다. 역시 모두 인구 감소 지역이다. 광주시에선 올 7월 마감한 쓰레기소각장 이전에 6곳이 신청했다. 그렇다고 기피시설을 인구 감소 지역에 몰아넣는 게 지방 살리기 해법이 될 순 없다. 기껏해야 급한 불을 끄는 정도일 것이다. 신공항을 짓거나 고속도로를 만드는 것도 마찬가지다. 지역이 살아날 수 있는 근본 해법은 청년들이 돌아오고, 신혼부부들이 자리 잡고 아이를 키울 수 있을 만큼 매력적인 지역을 만드는 것이다. 매력의 상당 부분은 진심에서 나온다. 지난달 충남 태안군 이원면에서 펜션을 운영하는 부부가 둘째를 낳았을 때 마을 곳곳에는 ‘우리가 너를 지켜주겠다’는 플래카드가 나붙었다. 2년 전 첫째에 이어 둘째까지 낳자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내건 것이다. 서로에게 감동한 부부와 주민들이 쉽게 헤어지긴 어려울 것이다. 그런데 어느 지자체가 매력적인지 도시에선 알기 어렵다. 그렇기에 일단 인연을 맺고 경험해 보는 게 중요하다. 정부는 올해 일시 체류자까지 포함하는 생활인구 개념을 도입했고, 거주 외 지자체에 기부하면 세금 공제와 답례품 혜택을 주는 고향사랑기부제를 시작했다. 둘 다 지역이 도시민들과 인연을 맺고 관계를 발전시킬 수 있게 만드는 제도들이다. 마침 이번 주말(1∼3일) 서울 서초구 aT센터에선 ‘2023 A Farm Show―창농·귀농 고향사랑 박람회’가 열린다. 광역 및 기초지자체 243곳이 저마다 발산하는 매력을 한자리에서 경험하기 위해 주말 한나절을 투자하는 게 결코 밑지는 장사는 아닐 것이다. 장원재 사회부장 peacechaos@donga.com}

    • 2023-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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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장원재]불안한 나라의 고립된 청년들

    이달 3일 경기 성남시 분당구 서현역에서 차량 및 흉기 난동으로 14명의 사상자를 낸 최원종(22)에 대해 알려졌을 때 눈길이 간 건 ‘3년 전 조현성 인격장애(분열성 성격장애) 진단을 받고도 치료를 안 받았다’는 대목이었다. 2020년이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초기 온 국민이 외출을 삼가던 시기였다. 당시 병원 내 감염을 우려해 내원을 기피하면서 어린이·청소년 정신질환자 65%의 증상이 악화됐다는 연구 결과가 발표됐다. 그리고 경찰에 따르면 최원종의 휴대전화 포렌식에선 지인들과 유의미하게 교류한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다. 비슷한 시기 정신적 문제를 지닌 채 고립됐던 건 올 5월 부산에서 20대 여성을 살해한 정유정도 마찬가지였다. 정유정은 최원종보다 두 살 위였지만 고교 졸업 후 공무원 시험을 준비한다며 틀어박혔고, 역시 연락하고 지낸 친구가 거의 없었을 정도로 사회적 관계가 단절돼 있었다. 최근 신상이 공개된 2030 흉악범의 공통점은 열등감이나 피해망상에 시달리다 범죄를 저질렀다는 것이다. ‘특정 조직이 나를 스토킹한다’고 했던 최원종, ‘영어 실력이 안 좋아 스트레스를 받았다’던 정유정, ‘남들도 불행하게 만들고 싶었다’는 조선 모두 마찬가지였다. 이들의 또 다른 공통점은 자포자기 상태에서 범행 은폐를 안 했거나, 현실감이 떨어져 금방 잡힐 정도로 대충 했다는 점이었다. 물론 은둔형 외톨이나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이들 중 범죄자는 극소수다. 또 유사 범죄를 막기 위해서라도 최원종 정유정 조선 모두 엄하게 처벌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우리 사회가 코로나19 기간 고립을 당연시하고 각자도생하느라 사회와 단절된 이들에게 유의미한 관계나 적절한 치료를 지원하지 못한 것 또한 사실이다. 많은 이들의 지적처럼 한국은 다이내믹하지만 그만큼 피곤한 사회다. 경쟁이 치열하고 속도가 빨라 뒤처진 이들이 조바심과 스트레스, 열등감을 느끼기 쉽다. 특히 코로나19 기간 타인과 소통·교류하지 못한 청년들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올라오는 화려한 일상을 보면서 ‘왜 나만 이렇게 살아야 하나’라고 생각할 수 있다. 코로나19로 인한 청년층 삶의 질 저하가 한국만의 문제는 아니다. 일본 내각부의 ‘국민 생활에 관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2019년 86%였던 만 29세 이하 청년층의 생활 만족도는 지난해 61%로 급락했다. 통계 조사 방식이 바뀐 영향을 일부 감안하더라도, 2011년 출간돼 화제가 된 책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에서 소개한 이른바 ‘사토리 세대’(욕심을 버리고 소소한 즐거움을 누리는 세대)가 더 이상 대세가 아니란 뜻이다. 한국의 경우 높아진 집값과 물가 때문에 청년들이 안분지족의 삶을 누리기 더 쉽지 않은 상황이다. 사회적 만남과 관계에서 의미와 보람을 느껴본 적 없는 청년들에게 ‘이제 방역 조치가 완화됐으니 알아서 사회적 관계를 회복하고 필요하면 병원에 가 치료를 받으라’란 말은 ‘새만금 잼버리에 고생하러 왔으니 각자 알아서 고생하다 가라’는 말만큼이나 무책임하다. 올 초 발표된 서울시 조사에 따르면 전국에서 고립된 청년은 61만 명으로 추정된다. 이들이 사회의 불안을 키우는 상황을 더 이상 원하지 않는다면 지금이라도 방치하는 대신 사회가 이들에게 손을 내밀어야 한다. 혹시 은둔 중이거나 고립된 청년이 이 글을 읽는다면 두 가지만 얘기해 주고 싶다. SNS에서 보이는 화려한 일상은 허구이고 누구든 각자의 불안 속에 살고 있다고, 그리고 손을 내밀면 잡아줄 사람은 분명 어딘가 있으니 포기하지 말라고. 장원재 사회부장 peacechaos@donga.com}

    • 2023-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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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장원재]지하차도 50cm 침수 규정, 이렇게는 안 된다

    15일 충북 청주시 오송읍 지하차도 참사 발생 직후 충북도는 “매뉴얼상 지하차도 중심에 물이 50cm 이상 차올라야 교통 통제를 하는데 제방 붕괴 전 그런 징후가 없었다”고 해명했다. 제방이 무너지고 순식간에 강물이 밀려들면서 미처 통행을 제한할 수 없었단 취지였다. 나중에야 50cm 침수 규정이 통제 요건 5개 중 1개일 뿐이며 다른 요건 일부를 충족해도 교통 통제가 가능하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하지만 필자에겐 충북도의 해명에 포함된 50cm라는 수치가 공직사회의 적당주의를 여실히 보여준다는 생각이 들었다. 첫째, 충북도는 논란이 되자 “승용차 타이어 반 바퀴인 50cm를 교통 통제 기준으로 정했다. 그 이상이면 차량 운행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 설명은 엉터리였다. 국내 승용차 타이어의 최대 지름(외경)은 60∼70cm이고, 그 절반은 30∼35cm다. 또 행정안전부 재난안전관리본부는 타이어 ‘절반’이 아니라 ‘3분의 2 이상’ 물이 차면 엔진룸으로 물이 들어가기 때문에 운전이 어렵다고 설명하고 있다. 충북도 기준대로 50cm 침수될 경우 이미 승용차 대부분 엔진룸에 물이 들어간 다음이라 대피할 수 없다는 뜻이다. 필자와 통화한 35년 경력의 재난 전문가도 “옆 차를 보고 타이어 절반(30∼35cm)이 잠기면 대피 준비를 하고, 3분의 2(40∼46cm)가 잠기면 차를 버리고 나와야 한다”고 했다. 둘째, 수심이 50cm인 경우 이미 지하차도로 진입한 자동차 운전자들이 차를 버리고 대피하기 어렵다. 재난안전관리본부에 따르면 성인 기준으로 남성은 수심 70cm, 여성은 50cm, 그리고 초등학교 5∼6학년은 20cm 이상이면 보행이 곤란하다. 이 때문에 수심이 20cm 이하일 때 대피를 권고한다. 이번처럼 경사진 지하차도 위에서 대량의 물이 세차게 밀려드는 경우 보행 가능 수심은 더 낮아질 수밖에 없다. 2014년 국립재난안전연구원 실험에선 무릎 높이에 해당하는 45.5cm 이상 침수된 상태에서 계단을 오를 경우 남녀를 불문하고 대피할 수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셋째, 참사가 난 지하차도는 상습 범람 하천인 미호강과 불과 300∼400m 떨어져 있다. 이번처럼 미호강이 범람할 경우 지대가 낮은 해당 지하차도는 급속히 침수될 수밖에 없는데, 다른 지하차도처럼 50cm 침수 여부를 따지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 한 지자체 관계자는 “지자체가 교통 통제 기준을 정하더라도 하천 인근 지하차도에는 별도 기준을 적용하는 게 맞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충북도의 50cm 규정은 합리적이지도 않지만 보편적이지도 않다. 지하차도 통행 제한 수심은 서울은 10cm, 부산은 10∼15cm다. 서울시 관계자는 “서울은 인구가 많은 만큼 피해를 줄이기 위해 선제적 기준을 정한 것”이라고 했다. 이번 참사를 두고 지난해 경북 포항 아파트 지하주차장 참사, 3년 전 부산 초량지하차도 참사와 판박이란 말이 나온다. 제 역할을 못 한 관리자, 급속히 유입된 물, 부실했던 방재 설비 등 공통점이 많기 때문이다. 차이가 있다면 희생자 수가 3명, 7명, 14명으로 갈수록 커졌다는 것이다. 앞으로도 지하공간 침수 사고는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지하공간 활용이 늘어나는 동시에 극한호우 등 이상기후가 일상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향후 지하에서 대형 참사가 벌어지는 걸 막기 위한 시작은 50cm 침수 규정에서 보여지는 적당주의를 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면밀한 검토를 통해 보다 합리적이고 현실적인 방재 규정을 만들어야 한다.장원재 사회부장 peacechaos@donga.com}

    • 2023-0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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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장원재]퀴어축제, 막을 수 있나

    대구퀴어문화축제(퀴어축제)가 처음 열린 건 2009년이다. 서울에 이어 국내 주요 도시 중 두 번째였다. 대구 동성로에서 하다 2019년부터 현재의 중앙로 대중교통전용지구로 옮겼는데, 14년 동안 여러 우여곡절을 겪었다. 2014년에는 기독교 단체가 거리를 막고 연좌 농성을 했다. 당시 경찰은 “신고된 집회를 방해하면 집회방해죄로 체포될 수 있다”고 했으나 이들은 물러서지 않았고 결국 주최 측이 코스를 변경했다. 이듬해에는 경찰 측에서 먼저 “시위 장소가 주요 도로여서 심각한 교통 불편을 줄 게 명백하다”며 금지를 결정했다. 주최 측은 법원에 가처분 신청을 제기했고, 신청이 받아들여져 예정대로 열렸다. 2018년에도 기독교 단체와 충돌이 이어졌다. 이후 주최 측은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서를 냈고, 인권위는 경찰에 “제3자 방해로 집회 자유가 제한되지 않도록 적극 보호하라”고 했다. 경찰은 “법 절차에 따르겠다”며 이를 수용했다. 사실 질서 유지 책임이 있는 경찰로선 매년 논란과 충돌을 부르는 퀴어축제가 반가울 리 없다. 하지만 금지해도 법원이 허용하고, 주최 측을 보호하란 권고까지 나오니 진퇴양난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질서 유지에 나선 것에 가깝다. 올해도 기독교 단체와 상인회가 집회금지 가처분 신청을 제기했지만 법원이 기각했다. 그런데 지난달 16일 퀴어축제를 둘러싼 가장 극적인 충돌이 발생했다. 대구시 공무원들이 경찰을 막으며 약 40분간 몸싸움을 벌인 것이다. 법원은 신고된 집회·시위의 경우 별도 도로 점용 허가 없이도 일정 부분 도로 사용이 불가피하다고 인정한다. 다만 “도로 점용은 지자체 허가 사항”이란 홍준표 대구시장 주장에도 일리는 있다. 한 정부 관계자는 “원칙적으로 집회를 신고한다고 도로 점용이 자동 허용되는 건 아니다. 장시간 도로 점용을 정당화하는 판례도 없다”고 했다. 시민 불편을 야기하며 주요 도로를 막는 시위가 일상화되는 것도 문제다. 하지만 홍 시장이 “공공성 있는 집회로 보기 어렵다” “1%도 안 되는 성소수자 권익만 중요하냐”고 말한 건 자칫 시위 성격을 규정하려는 것으로 보여 우려스럽다. 정부·지자체가 공공성이나 대표성을 따지기 시작하면 반대 세력의 집회에 대한 억압이나 법에서 금지한 ‘시위 허가제’로 이어질 가능성도 있다. 참고로 퀴어축제가 진행된 중앙로 대중교통전용지구에서 열린 첫 집회는 2016년 촛불집회였다. 당시 집회도 박근혜 정부에서 보기엔 공공성 없는 반정부 시위였을 것이다. 시 공무원과 경찰이 대낮에 몸싸움을 벌인 것도 볼썽사납다. 공권력이 제 살 깎아먹기식 대응으로 스스로에 대한 신뢰를 저하시키는 건 누구에게도 도움이 안 된다. 문제는 ‘퀴어 축제냐 아니냐’가 아니라 ‘집회의 자유와 시민의 권리 침해를 어떻게 조화시킬지’다. 이와 관련해선 대통령실에서 의견을 취합 중이고, 홍 시장도 법제처에 유권 해석을 의뢰했다니 합리적 결론이 나오길 기대한다. 물론 교통 불편 등을 이유로 퀴어축제에 반대하는 것도 자유다. 원한다면 손팻말 들고 반대 시위를 하거나 SNS 등을 통해 의견을 밝히면 된다. 집회·시위 등을 통해 자신의 의견을 드러내고 여론을 형성하는 건 민주주의 사회에서 자연스러운 과정이다. 오늘(1일)은 서울퀴어축제 퍼레이드가 중구 을지로 일대에서 열린다. 공권력끼리는 물론 시민 간 충돌도 없이 서로의 목소리를 내는 자리가 되길 바란다. 장원재 사회부장 peacechaos@donga.com}

    • 2023-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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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장원재]누구를 위하여 경계경보는 울리나

    도쿄 특파원 시절 손꼽히는 지진 전문가 히라타 나오시 도쿄대 교수를 인터뷰한 적이 있었다. 경북 경주시에서 규모 5.8의 지진이 난 직후였는데 히라타 교수는 “일본인이라고 대형 지진에 익숙할 거라는 건 오해”라며 “일본인 중에도 일생 동안 대형 지진을 경험하지 않는 이들이 더 많다”고 했다. 생각해 보니 맞는 말이었다. 1995년 고베 대지진, 2011년 동일본 대지진, 2016년 구마모토 대지진 등은 상당한 거리를 두고 발생했다. 히라타 교수는 “결국 일본이든 한국이든 경험을 통해 대형 지진에 대비하는 건 어렵다는 뜻”이라며 “그래서 간접 경험을 제공하는 방재교육과 훈련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지난달 31일 서울시의 경계경보 발령을 둘러싸고 ‘오발령’이란 지적과 ‘과잉 대응이 낫다’는 반론이 나온다. 하지만 명백한 건 행정안전부와 서울시가 비상 상황에 제대로 준비돼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행안부의 경우 ‘경보 미수신 지역은 자체 경계경보를 발령하라’고 해놓고 서울시 문의전화를 받지 않아 오발령 소동을 자초했다. 서울시에서 경계경보를 발령하고 재난 문자를 보내자 그제야 부랴부랴 서울시에 5차례 연락했고 정정 조치가 안 취해지자 ‘오발령’이란 재난 문자를 보내 혼란을 가중시켰다. 서울시는 더 어설펐다. 경계경보는 오전 6시 32분에 발령해 놓고 정작 재난 문자는 9분 이후 보내 북한 발사체가 서해에 떨어진 다음에 시민들이 대피하게 했다. 매뉴얼대로 보낸 재난 문자에는 경계경보 발령 이유와 대피 방법도 안 나와 있었다. 오전 7시 25분 경계경보를 해제할 때는 재난 문자 대신 일반 안내 문자로 보냈고, 해제 사이렌도 안 켰는데 모두 규정 위반이다. 서울에서 경계경보가 발령된 건 1996년 미그기 귀순 후 27년 만이다. 당시 경보 발령을 제때 내보내지 않아 서울시 경보통제소장 등 4명이 구속됐는데 당시를 기억하는 서울시 민방위경보통제소 입장에선 일단 경보를 발령하고 보자는 식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경계경보 발령 시 사이렌이 울리고 방송이 나왔지만 뭐라고 하는지 알아듣기 어려웠다는 지적도 많았다. 문재인 정부에서 북한이 미사일을 43차례나 쐈지만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등을 이유로 민방위 훈련을 건너뛰면서 서울시도 6년 동안 사이렌 가청률(실제로 들리는 정도) 조사를 안 한 탓이다. 준비돼 있지 않았던 건 국민들도 마찬가지였다. 주변에도 많은 이들이 경보를 받고 머리가 하얗게 변하면서 발만 동동 굴렀다고 했다. 북한의 거듭된 경고와 도발에 무감각해진 나머지 공격이 현실화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머릿속에서 지운 것이다. 북한 도발 수위가 점차 올라간 것과 대조적으로 사재기가 자취를 감춘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필자는 2016년 구마모토 대지진 당일 현장에 있었다. 한밤중에 한국 기준 진도 9의 강진으로 침대가 롤러코스터처럼 흔들리는 걸 경험하며 재난 대비 훈련의 중요성을 느꼈고 도쿄로 돌아와선 지자체 재난 훈련에도 참가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우왕좌왕하면서 미사일 공격은 또 다르다는 걸 실감했다. 결국 답은 히라타 교수의 말처럼 ‘교육’과 ‘훈련’뿐이다. 행안부와 서울시는 실전 같은 훈련을 되풀이하며 이번 같은 일이 재발하지 않게 해야 한다. 국민들도 귀찮아하는 대신 인근 대피소를 파악하고 기회가 있으면 훈련에 적극 참여해야 한다. 일본에서 귀에 못이 박히게 들었던 게 신속한 통보만큼 ‘자조(自助·스스로 구함)’와 ‘공조(共助·이웃을 도움)’가 중요하단 말이었다. 정부와 지자체 탓만 해선 안 된다. 결국 경계경보 사이렌은 국민을 위해 울리는 것이고 이를 듣고 어떻게 행동할지는 각자의 몫이기 때문이다. 장원재 사회부장 peacechaos@donga.com}

    • 2023-0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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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동훈 장관이 싸워야 할 대상[오늘과 내일/장원재]

    한동훈 법무부 장관이 17일 취임 1년을 맞았다. 한 장관의 1년을 가장 잘 표현하는 단어는 ‘전사(戰士)’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국민 상당수는 국회에서 야당 의원의 지적을 거침없이 받아치던 모습으로 한 장관을 기억한다. 전투력도 입증했다. 한 장관과 원색적 표현까지 동원하며 치고받았던 더불어민주당 김의겸 의원은 대변인 자리에서 물러났다. 한 장관 인사청문회 당시 ‘이모(某) 교수’를 ‘이모(姨母)’로 이해하고 질문했던 김남국 의원은 가상화폐 대량 보유 논란에 휩싸여 한 장관으로부터 “몰래 코인하다 금융당국에 걸린 게 왜 ‘제 작품’이냐”는 비아냥을 듣는 처지가 됐다. 하지만 최근 참여연대와의 공방처럼 고개를 갸웃하게 만든 경우도 있었다. 참여연대가 10일 홈페이지 설문조사 결과를 발표하며 “교체 대상 고위 공직자 1위가 한 장관”이라고 발표하자 한 장관은 당일 곧장 “특정 진영을 대변하는 정치단체가 왜 중립적 시민단체인 척하느냐”고 맞받았다. 이후 일주일 동안 한 장관과 참여연대는 네 차례씩 추가로 공방을 주고받았다. 한 장관은 1년 동안 지난 정부의 유산과도 싸웠다. 비록 헌법재판소가 한 장관의 권한쟁의심판 청구를 각하하긴 했지만 ‘검수원복’(검찰 수사권 원상 복구) 시행령을 주도하며 검찰의 수사 범위를 대폭 확대했다. 서울남부지검에 금융증권범죄합수단을, 대검찰청에 마약·조직범죄부를 부활시키며 금융범죄와 마약사범, 조폭 단속에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다만 어떤 장관이든 지난 정부에서 했던 일을 지웠다거나 야당 의원과 싸웠다는 이유로 후대에 좋은 평가를 받긴 어렵다. 한 장관이 남은 임기 동안 본격적으로 자신의 레거시 만들기에 집중해야 하는 이유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이라도 국내외에서 높은 평가를 받는 법무부 장관과 그렇지 않은 법무부 장관 사례를 돌아볼 것을 권하고 싶다. 해외 사례를 보면 미국에는 타임지가 소개한 ‘역대 최고의 각료 10’에 법무장관으로 유일하게 이름을 올린 로버트 케네디 전 장관이 있다. 만 35세에 장관이 된 그는 존 F 케네디 전 대통령의 동생으로 한 장관처럼 “지고 못 사는 성격”이란 평가를 받았다. 재임한 3년 8개월 동안 부패한 노조 지도자 지미 호퍼를 몰아붙였고, 마피아 등 조직범죄와 전면에서 싸웠다. 동시에 인종차별을 금지하는 시민인권법 통과를 주도했고, 흑인 학생을 대학에 입학시키라는 연방법원 결정을 이행하기 위해 앨라배마주립대에 연방 보안관을 파견해 보호했다. 주지사가 “학교를 모독하는 행위”라고 하자 그는 “이 학생들은 학교에 다닐 자격이 있다. 막으면 밀어붙일 수밖에 없다”며 거칠게 맞섰다. (타임지가 ‘역대 최악의 각료 10’으로 소개한 법무장관도 3명 있으니 이는 직접 찾아보면 좋겠다.) 국내에선 2020년 한 일간지가 법조인을 대상으로 ‘역대 최고의 법무부 장관’을 물었을 때 김대중 정부 시절 임명된 최경원 전 장관이 가장 많은 표를 받았다. 최 전 장관은 정치적 이슈와 거리를 두며 외풍을 막기 위해 노력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법무부 내 인권 부서를 확대했고, 검찰인사위원회에 외부 인사를 참여시키는 등 개혁도 시도했다. 이들 사례를 참고하면 한 장관이 누구를 위해, 누구와 싸워야 하는지에 시사점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마지막으로 역시 미국에서 존경받는 법무장관으로 꼽히는 로버트 잭슨 전 장관의 연설 ‘연방검사’ 중 한 대목을 한 장관에게 상기시켜 주고 싶다. “지역 경찰이 교통규칙을 엄격하게 적용할 경우 하루아침에 운전자 절반을 체포하게 될 것이다. 모든 검사는 극악하고, 공공에 미치는 해악이 크며, 증거가 매우 명백한 사건만을 골라 기소해야(다퉈야) 한다.” 장원재 사회부장 peacechaos@donga.com}

    • 2023-0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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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장원재]공인중개사는 누구 편인가

    오래전 신혼집을 구할 때였다. 부동산에서 만난 공인중개사는 “곧 아파트 인근 군부대가 이전하고 터널이 뚫리면 집값이 크게 오를 것”이라고 호언장담했다. 가격이 안 맞아 자리를 뜨자 여러 번 전화해 “집주인과 오늘 오후 6시까지만 이 가격으로 팔기로 했다”고 압박했다. 결국 계약했지만 10년 후 집을 팔 때까지도 터널은 뚫리지 않았고 ‘공인중개사는 누구 편인가’란 의문이 가시지 않았다. 최근 당시 기억이 되살아난 건 인천 ‘미추홀구 건축왕’ 일당 공소장을 읽으면서였다. 공소장에는 주범 남모 씨(61) 외 공인중개사 6명이 범행에 가담한 것으로 나와 있다. 이들은 남 씨의 중개팀에 소속돼 급여와 상여금을 받았고, 일부는 자신의 명의를 빌려줘 남 씨가 주택을 사들이게 하는 대가로 매달 돈을 받은 것으로 조사됐다. 부동산을 찾은 사회 초년생들이 망설이면 “집주인이 건물 여러 채를 보유해 보증금을 충분히 돌려줄 수 있다”고 설득했다. 근저당권이 설정된 점을 지적하면 “한 번도 문제 생긴 적 없으니 걱정 말라. 전세금을 못 돌려주는 경우 책임지겠다”고 했다. 공인중개사사무소 명의의 이행각서나 공제증서도 써 줬는데 이 역시 남 씨의 지시였다고 한다. 본보가 입수한 공제증서에는 한국공인중개사협회장 명의로 ‘중개 사고가 발생한 경우 협회에 요구하면 1억 원 내에서 배상해 주겠다’는 내용이 포함돼 있었다. 다만 중개사들이 설명하지 않은 건 배상 한도가 그해 해당 중개업소에서 발생한 모든 사고에 적용된다는 것이었다. 예컨대 해당 중개업소에서 한 해 100건의 사고가 났다면 피해자 1명이 받을 수 있는 돈은 100만 원에 불과하다. 공소장에 따르면 남 씨 일당에 소속된 공인중개사들은 한 명당 남 씨의 주택을 25∼85회 거래했다. 주모자는 남 씨였지만 일당 61명의 중심에는 공인중개사 6명이 있었다. 그 결과 20, 30대 청년 3명이 극단적 선택을 했다. 인천에서만 그런 게 아니다. 경기 구리에선 경찰이 전세사기 혐의를 받는 공인중개사 약 40명을 입건해 수사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계약당 수백만 원씩 뒷돈을 받은 공인중개사는 300명이 넘는다고 한다. 동탄에서도 전세사기에 가담한 혐의로 공인중개사가 출국금지 상태에서 수사를 받고 있다. 피해 주택을 중개했던 부동산의 공인중개사는 본보 기자에게 “넘겨받은 사무소인데 전임자가 사고 거래를 하도 많이 해 고소한 상태”라고 했다. 공인중개사법에 따르면 공인중개사는 ‘전문직업인으로서 신의와 성실로 공정하게 중개 관련 업무를 수행해야’ 한다. 하지만 공소장에 따르면 미추홀구에서 집을 구하던 사회 초년생들이 공정한 중재자를 기대하며 부동산을 찾았을 때 이들을 맞이한 건 범죄조직의 하수인이었다. 그럼에도 한국공인중개사협회는 협회 차원의 사과 한번 하지 않았다. 대신 공인중개사협회를 법정단체로 만들어 달라는 서명을 대통령실과 국회 등에 전달하는 등 이번 기회를 숙원 사업 해결에 활용하려 시도 중이다. 부동산 업계의 일탈은 하루 이틀 된 문제가 아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규모와 정도가 도를 넘었다. 전국에서 유사한 일이 발생했다면 11만 중개사 중 일부의 일탈로 치부할 게 아니라 고개를 숙이고 뼈를 깎는 자정 노력을 하겠다고 밝혀야 한다. 국민의 신뢰를 받지 못하는 공인중개사는 바가지 씌우기의 대명사였던 ‘용팔이’와 다를 게 없다. 수사당국과 사법부도 국가 공인 자격증을 가진 사람들의 일탈을 더 엄격하게 처벌해야 한다. 최근 권경애 변호사 사태에서 볼 수 있듯이 전문 자격증 소지자의 과실은 국민에게 치명적인 피해로 돌아오고, 사회 전체의 신뢰를 저하시키기 때문이다.장원재 사회부장 peacechaos@donga.com}

    • 2023-0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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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장원재]나이지리아 4남매의 비극

    4남매의 비극이 시작된 곳은 현관 앞에 있던 멀티탭이었다. 지난달 27일 오전 3시 반경 TV와 냉장고가 연결돼 있던 멀티탭에서 발생한 스파크는 금세 불길로 번졌다. 아버지(55)는 연기 속을 뚫고 빠져나와 구조를 요청했지만 안방에서 자던 네 남매는 끝내 돌아오지 못할 길을 떠났다. 지난달 31일 경기 안산시의 한 장례식장에선 이들 남매의 발인식이 열렸다. 탈출 과정에서 양발에 화상을 입은 아버지는 휠체어에 탄 채 내내 침통한 모습이었다. 막내딸(2)을 던진 후 본인이 뛰어내리는 과정에서 허리를 다친 어머니(41)는 보조기를 찬 채 현실이 믿기지 않는 듯 연신 아이들 이름을 불러 주위를 안타깝게 했다. 이번 사고를 되짚어보면 한국 사회에서 소외된 이들이 어떤 현실에 처해 있는지 알 수 있다. 먼저 사고를 당한 나이지리아인 가족 7명은 21㎡(약 6.4평) 크기 빌라에서 지냈다. 다섯 남매가 2∼11세라는 점을 감안해도 1인당 1평이 채 안 되는 면적이다. 서울 시내 고시원 평균이 7.2㎡(약 2.2평)라는 걸 감안하면 얼마나 열악한지 알 수 있다. 이 가족만 특별히 그런 것도 아니었다. 이 빌라에는 비슷한 면적의 집에 나이지리아인, 러시아인, 우크라이나인 등 총 11가구, 41명이 거주했다. 더 안타까운 건 전조가 여러 차례 있었음에도 비극을 막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들 가족은 2021년 1월에도 지내던 반지하 집 벽면 스위치에서 불이 나 집이 전소되고 둘째 아들이 화상을 입었다. 시민단체 등의 도움으로 간신히 수술비를 해결했지만 이후에도 스프링클러 없는 좁고 노후화된 안산 일대 빌라를 벗어나지 못했다. 아버지는 본보 기자에게 “예전에도 멀티탭에서 불꽃이 난 적 있었지만 그냥 넘겼다”고 했다. 이들 가족은 2017년 2월부터 모든 주택에 소화기와 화재경보기가 의무화됐다는 사실도 알지 못했고, 화재를 방지하거나 확산을 막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몰랐다. 안산소방서가 화재 발생 2주 전 재난 취약계층에게 소화기와 화재경보기를 지원하겠다고 발표했지만 이 역시 남의 얘기였다. 불법체류자가 아니었지만 정부와 지방자치단체의 사회복지망에서도 배제됐다. 15년 전 한국에 온 아버지는 나이지리아에 중고 물품을 수출하는 일을 했는데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등의 영향으로 최근 벌이가 좋지 않았다. 하지만 가족 중 내국인이 적어도 1명 있어야 한다는 조건 때문에 기초생활수급 대상에서 제외됐다. 또 2년 전 사고로 화상을 입은 둘째는 자폐성 장애가 심했지만 적절한 교육이나 복지 지원을 받지 못했다. 학교도 못 간 채 방치됐는데, 외국인이라 의무교육 대상도 아니었다. 이들 가족을 아는 한 지인은 “둘째가 자폐 때문에 집에 있으니 어머니가 다른 자녀를 데리고 병원에 가면 큰딸(11)이 학교를 쉬고 둘째를 돌보곤 했다”고 말했다. 큰딸과 셋째 아들(5)은 이주민 공동체에서 후원금 등으로 운영하는 대안학교에 다녔다. 이번 사고를 개인의 부주의 탓으로 돌리긴 쉽다. 2년 전 그랬던 것처럼. 하지만 그럴 경우 유사한 비극은 어딘가에서 반복될 수밖에 없다. 최근 정부는 이민청을 설립한다며 한창 준비 중이다. 하지만 합계출산율 0.78명 시대에 고학력 엘리트 이민자만 곶감 빼먹듯 받아선 인구를 보전할 수 없다. 정부 당국자 누군가는 한국 사회의 미래와 보편적 인권 보장을 위해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이주민들에게 최소한의 삶을 보장할 방법을 고민하고 있으리라 믿는다. 그 당국자가 나이지리아 4남매의 비극을 한 번 더 생각해 봤으면 하는 마음에 조금 늦었지만 글을 남긴다.장원재 사회부장 peacechaos@donga.com}

    • 2023-0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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