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대의 컴퓨터 제조업체 HP는 지난달 열린 주총에서 투자자들에게 이사회 후보 지명권을 부여하는 규정을 놓고 찬반 투표를 벌였다. 52%의 반대로 규정 신설은 무산됐지만 이는 경영진이 막강한 재량권을 행사하는 미국 기업의 ‘닫힌’ 지배구조를 위협하는 상징적인 사건으로 평가받았다.
정기 주총 시즌을 맞은 미국에서 경영진의 연봉이나 이사회의 인사권에 이르기까지 기업의 지배구조에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투자자들의 움직임이 거세다고 영국 파이낸셜 타임스가 2일 보도했다.
▽“CEO 연봉 우리가 결정한다”=기업가들의 천국인 미국에서 주주 운동이 벌어지게 된 것은 잇따른 기업의 스캔들 때문이다. 2001년 엔론사의 회계 부정 사건에 이어 지난해에는 HP가 특정 언론인과 직원들의 통화 내용을 도청한 사실이 드러났다.
연일 언론에 오르내리는 최고경영자(CEO)의 거액 연봉과 퇴직금, 해외 투자펀드의 지배구조 개선 요구도 주주 운동을 부채질하는 요인으로 꼽힌다.
여기에 상대적으로 ‘반(反)기업적’인 민주당이 다수당이 되면서 기업의 지배구조 개선 문제가 정치적 쟁점으로 떠올랐다. 민주당의 바니 프랭크 하원 금융위원회 위원장은 지난달 주주들이 경영진의 적정 보수를 권고할 수 있는 ‘권고 투표권(advisory vote)’ 법안을 제안했다. 세계적인 제약회사인 화이자와 보험회사 AIG가 권고 투표권 도입을 검토 중이다.
이 밖에 60여 개 기업이 투자자들에게서 애플랙사와 같은 규정을 도입할 것을 요구받았으며 이 중 10개사가 주주들의 표결을 거쳐 관련 규정을 도입하기로 합의했다.
기업들은 투자자들이 CEO의 연봉 결정에 이어 이사진의 인사권에까지 관여하려 할 것이라고 우려한다. 투자자들은 내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기업 정치헌금의 세부 항목을 공개하라며 활동 영역을 넓혀 가고 있다.
▽‘열린 지배구조’ 놓고 찬반 논쟁=주주 운동가들은 기업의 열린 지배구조가 기업의 회계 부정을 막고 투명 경영을 보장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특히 해외의 펀드매니저들은 경영진의 보수 결정이나 이사회 구성과 관련해 대부분의 국가에서 일반투자자의 권한을 인정하고 있는데 유독 미국만 금지해 왔다고 비판한다.
반면 기업들은 급변하는 경영 환경에 신속히 대처하려면 경영진이 폭넓은 재량권을 가져야 한다고 반박한다. 특히 헤지펀드가 단기 이익을 노려 열린 지배구조 체계를 악용할 우려가 있으며 장기적으로는 규제 강화가 기업의 경쟁력을 저해할 것이라고 우려한다.
대기업을 위해 활동하는 로비스트 존 카스텔라니 씨는 “기업의 의사결정은 민주적 과정이 아니다. 기업이 투표 체제로 가면 이사진과 CEO는 상품 개발보다 이해 집단을 만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진영 기자 eco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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