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이영대]美, 자연의 도전에 담대한 응전을

  • 입력 2005년 9월 8일 03시 0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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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5년 포르투갈의 리스본은 대지진으로 도시의 대부분이 파괴됐다. 당시 리스본 인구의 3분의 1인 10만 명에 달하는 사망자가 발생했다. 성직자들이 “타락한 속세에 대한 심판이 이루어진 것”이라며 대중을 질타할 즈음 선각자 볼테르는 ‘캉디드’라는 인물을 통해 현실의 불완전성과 모순을 직시하는 소설을 발표한다. 비록 이 작품은 제노아 대공회에서 소각하라는 결정이 내려져 즉시 불태워지지만 훗날 어두운 중세시대를 끝내고 18세기 계몽시대를 활짝 열어젖힌 승리의 상징으로 평가됐다.

2005년 아직 물에 잠겨 있는 것은 세기말적인 유혹과 야릇한 매력의 벽돌 건물 및 낡은 우체국 길, 그리고 작은 음식점이 늘어선 뉴올리언스의 ‘프렌치쿼터’ 거리만은 아니다. 삶이 고단하고 힘들 때 영혼을 위로하며 심연의 슬픔을 토해 내던 빌리 홀리데이의 ‘스트레인지 프루트’의 선율도 더는 들리지 않는다.

가득하던 삶의 생기는 사라진 대신 분명히 존재하면서도 볼 수 없었던 상처와 간극을 그대로 드러내는 비릿한 공기 속에서, 이웃은 그저 다시 돌아갈 수 있을 것인가를 고민하고 있다.

허리케인 카트리나는 평등권을 보장한 미국의 헌법전도 갈가리 찢어 놓았다. 학교에서의 흑백 통합을 선언한 브라운 사건의 판결문도, 축적된 민권운동의 결실도 갈라진 틈을 덮고 상처와 추위를 보듬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담요와 포도주가 될 수는 없는 듯하다. 심연 속에 아직 잠겨 있는 사람들처럼, 지금도 사회의 퇴적층의 맨 밑바닥에서 덜 진화한 화석의 모습으로 무겁게 눌려 있는 사람들의 가슴에서 뛰고 있는 것은 ‘어둠의 심장’이라고 할까.

독립전쟁의 치열한 현장에서 기초된 미국 헌법이 연방제도를 연대(連帶)의 핵심으로 구상한 것은, 서로 다른 이해관계와 정서를 가진 지방을 이어주는 신뢰의 표현이었다. 그럼에도 연방정부의 재정운영권이 ‘국방과 공공복리’에 국한된다는 헌법 제1조 8항은 지방정부의 위기관리 업무는 포함되지 않는 것으로 해석되어 왔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법원은 2개 이상 복수의 주에 관련된 경우에는 연방정부도 주 행정에 대해서 재정 집행을 할 수 있다는 ‘통상조항(commerce clause)’을 부분적으로 확대 적용하면서 전통적 해석을 극복해 왔다.

거대한 참사 속에 드러난 참담한 오늘, 자연의 도전에 대한 미국 사회의 총체적인 응전이야말로 ‘보편적인 생존 조건’임을 선언하자. 그것만이 헌법 원칙과 먼 곳으로 떠나 버린 것 같은 삶의 일상을 되찾을 수 있는 길이다. TV 화면은 비를 뿌린 하늘의 태양이 가로수 잎사귀 틈으로 다시 빛나고 있는 장면을 보여 준다. 아직 마르지 않은 대지는 다시 흙냄새를 뿜어낼 것이다. 카트리나의 의미는 생사의 갈림길에서 내버려진 사람들을 구한 정신력과 헌신을 통해 재탄생되어야 한다. “대홍수의 재앙 속에서 우리는 노를 저으며 투쟁했노라”는 이웃의 외침을 영웅담으로 기록해야 하리라.

18세기는 리스본 폐허의 현장을 순례하던 캉디드라는 현자(賢者)를 통해 비로소 자신의 모습을 직시하고, 대지진의 불행을 극복했다. 그는 21세기 뉴올리언스의 슬픔 속에서 무엇을 발견할 수 있을까. 지구 반대편의 도시에서도 홍수 전날 오후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시간처럼 감쪽같이 지나갔고, 귀여운 아이들의 머리를 만져 주는 도시의 그림자는 여전히 평온했을 게다. 또 다른 내일의 위기를 막기 위해서 ‘모두의 생명과 명예를 구할 수 있는 지혜를 달라’는 간구 이외에 오늘 담대한 용기로 절박하게 실천해야 할 일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인가.

이영대 한국 및 미국 뉴욕 주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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