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아닌유럽’ 발칸을 가다]<上>총선 부정시비 알바니아

  • 입력 2005년 7월 6일 03시 04분


《‘유럽 안에 있긴 하지만 유럽이라고 할 수도 없는 곳’, 그래서 유럽의 변두리일 수밖에 없는 지역 발칸(Balkan). 역사적으로 동서의 종교와 문명을 가르는 충돌선(fault line)이었고, 그래서 유럽의 ‘화약고’가 됐던 이 지역은 공산권 붕괴 이후 10여 년이 되도록 동(東)과 서(西), 그 어디에도 편입되지 못한 채 이젠 가난과 인권유린, 테러리즘의 ‘블랙홀’이 돼 버렸다. 유엔난민고등판무관실(UNHCR)과 국제이주기구(IOM)의 발칸지역 단기연수에 참여하고 있는 본보 이철희(李哲熙) 기자가 알바니아와 코소보, 마케도니아의 ‘슬픈 운명의 현장’을 들여다보았다. 순서대로 3차례에 걸쳐 소개한다.》

15세기 중반 전설적인 영웅 스칸데르베크가 오스만튀르크의 침입을 막고 민족 통합을 이뤘던 잠깐의 시기를 제외하곤 끊임없는 외세의 침략과 지배 아래 신음해 온 알바니아. 지금도 유럽에서 가장 가난한, 인구 350만여 명의 작은 나라다.

3일 실시된 알바니아 총선거는 ‘유럽의 일원’이 되느냐 마느냐를 결정짓는 선거였다. 중세 때부터 유명한 ‘피의 복수’ 전통을 가진 알바니아인 기질 때문일까. 지금까지의 선거는 폭력과 부정으로 얼룩졌다. 그러나 이번 선거는 좀 다른 듯했다.

수도 티라나 길거리마다 총선 후보자들의 포스터가 줄줄이 붙어 있고, 길거리 찻집은 정치토론에 열을 올리는 듯 시끄러웠지만 평소의 알바니아 거리 풍경과 특별히 다르지 않다는 게 ‘벤’이라 불리는 호텔 직원의 설명이다. 시내 중심의 스칸데르베크 광장도 여기저기 서성이는 실업자들과 거지들만 보일 뿐 한가한 모습이다.

‘사고’가 없지는 않았다. 선거관리위원회 직원 1명이 총격에 피살됐고, 선거가 끝난 뒤 야당의 승리를 자축하는 집회에서 또 1명이 숨졌다. 유럽안보협력기구(OSCE) 선거감시단 책임자인 모턴 오스테르가드 씨는 “지난 10년간 이 나라의 선거를 지켜봤지만 우리가 원하는 결과를 보지 못했다”며 “이번 선거도 민주선거의 국제기준을 부분적으로 충족했을 뿐”이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선거의 핵심은 정권의 향배가 아니었다. 초미의 핵심은 미국과 유럽 국가들이 알바니아 총선 결과를 어떻게 평가하느냐는 데 있다.

민주 정부가 탄생했다는 미국과 유럽의 ‘승인’이 있어야 유럽연합(EU)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 가입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공산 정권 붕괴 이후 10여 년이 흘렀지만 알바니아는 다른 동유럽권 국가들과 달리 체제전환이 가장 느린 국가로 꼽힌다. 수십 년에 걸친 공산독재의 결과 가난은 만성화됐다.

비공식적 통계로 실업률이 30%를 훨씬 웃도는 데다 국가의 가장 기본적 책무랄 수 있는 국경 통제마저도 국제기구의 지원을 받아야 하는 형편이니 ‘주권 국가’라고 부르기도 뭣하다. 해외로 탈출하는 알바니아인들의 행렬이 계속되고 있고, 조직적인 불법 이주 알선업체가 성행하고 있을 뿐 아니라 인신매매 조직마저 활개를 치고 있다고 IOM 관계자들은 설명했다.

‘EU에 가입하는 것만이 살길’이라며 목을 매고 있지만 최근 상황을 보면 이마저도 쉽지 않아 보인다. 그래서일까. 국민 사이에선 이제 운명처럼 돼 버린 알바니아의 슬픈 여정이 앞으로도 상당 기간 지속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비관론이 팽배해 있다.

24시간 위성뉴스TV ‘알 사트’의 아르디 플라즈(24) 기자도 “EU 가입이니 뭐니 가능할 것 같지도 않은 헛된 구호만 내세우는 정치인들에게 신물을 내는 젊은이가 많다”며 “나로서도 알바니아의 미래가 뭔지 잘 모르겠다”고 토로했다.

티라나(알바니아)=이철희 기자 klimt@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