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박원재/NHK 만큼만…

  • 입력 2003년 4월 24일 18시 35분


지난해 5월 초 일본 공영방송인 NHK의 에비사와 가쓰지(海老澤勝二) 회장은 기자회견을 열어 집권 자민당이 추진 중인 ‘미디어규제 3법안’을 비판했다.

그는 “각 매체의 활동은 헌법과 방송법의 토대 위에서 어디까지나 매체 종사자들의 자주적 판단에 따라 이뤄지는 것”이라며 “정부가 이를 규제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사실상의 임명권자인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총리에게 정면에서 반기를 든 것이다.

NHK 최고경영자인 회장은 각계 인사로 구성된 경영위원회가 12명의 위원 중 9명 이상의 찬성으로 결정한다. 하지만 경영위원 임명권은 총리가 갖고 있다. 그래서 역대 NHK 회장은 집권당이 방송전문가 중 후보를 내정하면 경영위원회가 이를 추인하는 식으로 임명됐다.

임명권자의 뜻을 거스른 에비사와 회장에 대해 정부 수뇌부는 어떻게 대응했을까. 기분이 좋지는 않았겠지만 “공영방송의 대표로서 할 수 있는 말”이라는 원론적 반응을 보였을 뿐이다.

KBS는 일본의 NHK처럼 ‘한국을 대표하는 공영방송’이다. 운영 재원을 주로 시청자 수신료에 의존하고 있으며 국가기간방송의 책무를 떠맡고 있다는 점에서 닮았다. 두 방송사 모두 조직이 비대해졌다는 비판도 받고 있다.

그러나 다른 점도 많다. 한국에서는 정권이 바뀔 때마다 KBS 사장 인선을 놓고 시끄럽지만 NHK 회장을 선임할 때 잡음이 빚어진 적은 거의 없다.

선거가 있을 때면 KBS는 편파보도 논란속에서 야당의 공격대상이 되곤 한다. 일본 정계도 여야간 공방전이 치열하지만 NHK가 정치보도와 관련해 야당의 항의를 받았다는 뉴스는 1년 넘게 일본에 살면서 한 번도 듣지 못했다.

한 대학강사는 “대다수 일본국민은 NHK 뉴스에 대해 ‘재미는 없지만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며 “그게 바로 NHK가 신뢰받는 비결”이라고 말했다.

KBS 이사회는 대통령에게 임명 제청할 신임 사장을 우여곡절 끝에 23일 다시 뽑았다. 선출과정의 논란과는 별도로 공영방송 대표가 갖춰야 할 덕목에 대한 논의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점은 유감이다. NHK의 사례에서 유추하자면 해답은 ‘공영방송의 독립성 확보를 위해 임명권자의 눈치를 보지 않는 신념’이 될 것이다.

KBS가 명실상부한 공영방송으로 국민의 신뢰를 얻으려면 NHK만큼만 하면 되지 않을까. 한국의 시청자도 BBC(영국)나 NHK와 같은 공영방송을 가질 권리가 있다.

박원재 도쿄특파원 parkwj@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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