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정가 거액 정치헌금 신원공개 논쟁

  • 입력 2001년 1월 2일 18시 39분


액수의 다과를 떠나 정치자금 기부자의 신분을 숨기려는 게 한국 정치권의 생리다. 그런데 영국 집권당인 노동당에서는 간부들이 직접 나서서 정치자금 기부자에게 신원을 밝히라고 촉구, 눈길을 끌고 있다.

노동당 하원 원내총무 클라이브 솔리는 1일 “우리 당에 거액의 정치자금을 기부한 익명의 기부자는 신분을 밝히는 데 동의해야 한다”고 말했다고 BBC 방송이 보도했다. 솔리 총무의 발언은 노동당이 5월에 있을 총선 자금을 모금하는 과정에서 익명으로 입금된 수백만파운드가 영국 정가에 한바탕 논란을 일으킨 뒤 나왔다. 노동당의 최대 지지그룹인 영국 노동조합들의 선거자금 헌금액이 1백만파운드(19억원)에 못 미칠 것으로 예상되는 상황에서 수백만파운드는 간단치 않은 액수다.

수백만파운드 모금 사실이 알려진 뒤 보수당 등에서는 “기부자의 정체를 밝히라”는 정치 공세가 시작됐다. 그러나 노동당은 “수백만파운드의 정치자금이 입금된 것은 사실”이라면서도 “기부자가 익명을 원한다”며 신분 공개를 거부해 왔다.

문제는 노동당 자신이 정치자금 기부자의 신분 공개 의무를 규정한, 새로운 ‘정당 선거와 국민투표법’을 입안한 점.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비준을 받아 발효될 이 법에 따르면 영국의 모든 정당은 2월까지 정치자금 기부자의 신분을 공개해야 한다.“자기들이 만든 법도 안 지키느냐”는 공세에 시달려온 노동당내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당내의 섀도 캐비닛 장관인 앤드루 랜슬리가 “우리 당이 위선적이어선 안된다”고 총대를 메고 나섰다. 여기에 당의 하원 사령탑격인 솔리 총무까지 가세함에 따라 베일에 가려져 있던 기부자의 정체도 조만간 드러날 것으로 보인다.

<박제균기자>phar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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