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러외무회담 결렬]너무앞선 낙관…「갈등불씨」못꺼

  • 입력 1998년 7월 27일 06시 49분


26일 필리핀 마닐라호텔에서 열린 박정수(朴定洙)외교통상부장관과 예브게니 프리마코프 러시아외무장관의 회담은 처음부터 긴장된 분위기에서 시작됐다. 회담 결과도 마찬가지였다.

비록 러시아정부의 조성우(趙成禹)참사관 추방으로 시작된 ‘외교관 맞추방사태’를 서로 ‘불행한 일’이라고 유감을 표명하고 사건 자체는 일단 ‘봉합’의 모양을 갖췄지만 정작 본질적인 한―러 우호협력관계는 얘기도 하지 못한 채 끝나고 말았다.

박장관을 수행한 외교통상부 고위간부가 예정시간을 훨씬 넘겨 진행된 회담 직후 “러시아가 왜 갑자기 경화된 태도를 보였는지 모르겠다”며 극도로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을 정도였다.

물론 한국정부는 이날 회담이 사실상 상호 ‘시각차’만 확인한 자리가 됐지만 추후 외교협의를 거쳐 당초 러시아측과 합의하려했던 ‘관계복원’조치들을 추진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추후협의는 차치하고 이번 외무장관 회담에서 한국정부는 대(對)러시아외교에 관한 한 ‘심각한 무능’을 노출했다. 외교통상부는 한―러간 외교관 맞추방사태 이후 시종일관 “한―러 기본관계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며 낙관해 왔다.

담당국장인 조일환(曺一煥)구주국장은 심지어 조참사관 사건이 한―러 양국 정보기관간의 갈등이 계속돼오던 과정에서 조참사관이 지나친 정보활동을 강행한 결과 발생한 일이라며 사건 자체를 ‘일과성(一過性)’으로 치부하기도 했다.

그러나 결과는 정반대로 한―러관계에 구조적인 문제점이 있는 것으로 드러난 것이다.

정부의 한 고위관계자가 회담 직전 “마닐라 한―러 외무장관회담으로 외교관 맞추방사태는 일단 봉합의 모양을 갖추겠지만 실제 외교전은 지금부터가 시작”이라고 말한 것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러시아정부가 조참사관을 스파이로 몰아 추방한 배경은 의도적인 것이고 러시아정부는 90년 한―소 수교 당시부터 한국에 기대했던 여러가지 이익들이 충족되지 않자 한―러 관계를 재고하려는 조짐을 보여왔다는 것이다.

아무튼 한―러관계는 근본적인 재점검이 필요한 것 같다.

〈마닐라〓김창혁기자〉ch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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