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이재경/‘리프먼의 연락선’

  • 입력 2004년 8월 15일 18시 5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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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터 리프먼이 생각한 섬에는 몇 명씩의 영국인과 프랑스인, 그리고 독일인이 살았다. 이 섬에는 60일에 한 번씩 영국 연락선이 들어온다. 때는 1914년 9월, 영국 프랑스 연합세력과 독일이 전쟁을 시작한 지 6주쯤 지난 시점이었다. 바깥소식을 전해 주는 유일한 통로가 연락선인 섬사람들은 선장이 전쟁소식을 가져오기 전 6주 동안을 아무 일 없이 평화롭게 지냈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대륙에서 전쟁소식이 전해지자 이 섬에서도 영국인, 프랑스인과 독일인 사이에 심각한 다툼이 벌어진다.

▷리프먼은 이 이야기로 ‘여론’이라는 책을 시작한다. 뉴스의 중요성과 또 한편으로는 역설을 설명하려는 의도다. 아무리 치열한 전쟁이라도 알려지기 전에는 힘이 없으니 뉴스가 중요하다는 뜻이요, 개인적으로는 전혀 원한이 없지만 국가간 전쟁 소식이 섬에 묻혀 사는 사람들의 작은 평화를 깨 버리는 점은 뉴스의 역설이다. 아마도 배가 들어오지 않았으면 리프먼의 섬에는 평화가 유지됐을 것이다.

▷최근 우리 사회에 ‘리프먼의 연락선’을 나무라는 정부 인사들의 얘기가 자주 들린다. 대표적인 사례는 대통령비서관의 언론 비판과 대통령 자신의 ‘완장론’이다. 대통령홍보수석비서관은 8일 한국 언론이 비관론만 부각시켜 경제 전망을 보도한다고 말했다. 그 다음 날 대통령은 국무회의에서 몇몇 언론사가 마치 스스로 완장을 찬 것으로 착각하고 부당한 권력을 행사한다고 비판하며, 그런 완장에는 굴복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한국 언론의 보도방식은 여전히 여러 가지 문제를 안고 있다. 아마도 가장 심각한 문제는, 한 언론인이 ‘요설’이라고까지 표현한, 정치인의 저급한 말을 지나치게 많이, 사실 여부조차 확인 없이 보도해 정쟁(政爭)을 부추기는 일이다. 이제는 말이 아니라 일에 주목하고, 계획보다는 실천을, 당무회의보다는 법안 내용을 중심으로 기사를 써야 한다. 아니, 한 일주일쯤 정치인을 취재하지 않는 것도 재미있는 실험이 될 것이다. 남는 지면은 정치소비자인 시민의 소리로 채우면 된다. 그러나 ‘연락선’을 끊을 수는 없다. 그런다고 전쟁이 없어지고 경제가 좋아지지는 않기 때문이다.

이재경 객원논설위원·이화여대 교수·언론학

jklee@ewha.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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