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막번역가」,아무리 긴대사도 「24자」로 줄이는 辯士

  • 입력 1998년 6월 30일 08시 39분


무성영화가 유행했던 시절, 화면속 주인공을 따라 관객들을 울리고 웃겼던 이는 재치있는 입담으로 줄거리를 설명하는 변사(辯士)였다.

시절이 바뀌어 화면속 배우들이 알아듣기 어려운 외국어로 떠들어도 여전히 관객들은 주인공을 따라 울고 웃는다. 새시대의 변사는 다름아닌 자막번역가들.

직배사와 영화수입업자들은 현재 외화 번역을 전담하다시피 하는 인물로 이미도 조상구 조철현씨 3명을 꼽는다.

이름때문에 여자일 거라는 오해를 많이 받지만 이미도씨(38)는 공군 영어교육장교 출신. 제대직후인 93년말 타르코프스키 감독의 ‘블루’ ‘레드’ ‘화이트’3부작 번역을 우연히 맡았다가 이 길로 들어서 지금까지 2백여편의 영화를 번역했다.

‘굿윌 헌팅’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 ‘아마겟돈’ ‘고질라’ 등 미국 직배사 영화들의 자막이 대부분 그의 작품. 장르를 불문하고 매끄러운 번역솜씨가 돋보인다는 평을 받는다.

그는 자막번역을 “외국의 정서를 우리식 정서로 옮기는 작업”이라고 설명한다. 외국인들이 웃는 대목에서는 우리 관객도 반드시 웃을 수 있도록 번역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철칙.

“영화 ‘노틀담의 꼽추’에서 ‘프롤로가 틀렸어(wrong)’라는 대사가 비슷한 발음인 ‘프롤로 코가 길대(long)’로 와전돼서 웃음을 자아내는 대목이 있는데 직역하면 얼마나 썰렁하겠어요. ‘프롤로가 틀니했대’로 번역했더니 웃음이 터지더라구요. 엄밀하게 따지면 틀린 번역이지만 효과로 보면 이게 옳죠.”

‘타이타닉’ ‘LA컨피덴셜’ ‘히트’ ‘시티 오브 엔젤’ 등을 번역한 조상구씨(45)는 80년 ‘병태와 영자’로 데뷔해 ‘공포의 외인구단’에서 까치 역을 맡았던 영화배우 출신. 생활이 너무 어려워 시작한 자막번역이 지금은 본업처럼 되어버렸다.

영화, TV드라마에 계속 출연하고 있는 그는 배우의 경험을 활용해 번역을 할 때마다 먼저 영화를 보고 대본을 읽은뒤 영화를 다시 보면서 주연 배우를 따라 직접 연기를 해본다. 이때문인지 그의 번역은 등장인물의 성격을 도드라지게 표현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영화사 씨네월드 상무이사인 조철현(39)씨는 ‘아미스타드’ ‘샤인’ ‘비밀과 거짓말’등 영어권 영화 뿐 아니라 중국어 실력을 활용해 ‘풍월’등 중국영화도 번역한 전천후 번역가. 11년동안 영화 7백여편을 번역했고 한창때는 1주에 5편씩 번역했던 적도 있다.

투박한 영어는 전라도 사투리로 번역하는 등 한국적 표현에 능하다는 평을 받지만 본인은 “지나친 의역을 혐오한다. 영화 자체가 언어상의 특이함을 갖지 않는다면 자막은 의식하지 못할 정도로 평이한 것이 좋다”고 말한다.

그가 번역한 영화의 마지막에는 좀처럼 ‘번역 조철현’이라는 자막이 등장하지 않는다. 코끼리가 주인공인 영화에는 ‘조끼리’, 앵무새가 등장하는 영화에는 ‘조앵무’, 이런 식이다.

한 화면에 들어갈 수 있는 자막은 한 줄에 여덟자, 길어야 세 줄을 넘기 어렵다. 자막번역가는 많은 대사를 모두 전달하지 않아도 주인공의 감정과 영화의 분위기를 압축된 자막으로 살려내야 한다.

이때문에 외화 자막번역은 피말리는 작업이다. 조상구씨는 두 번이나 쓰러져 링거주사를 맞아가며 번역을 했던 적도 있다.

약간씩 스타일이 다르지만 세 명이 모두 동의하는 ‘잘 된 번역’이란 관객이 영화를 본뒤 내가 자막을 읽었나 싶을 정도여야 한다는 것.

“자막번역은 공중에 뜬 말을 잡는 일입니다. 관객이 화면속 배우의 움직임을 보고, 목소리를 듣고, 자막을 보는 세 가지 행위가 동시에 무리없이 수용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게 자막번역가의 일이죠” (조상구)

〈김희경기자〉susann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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