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동김밥은 저렴한 냉동식품?’…편견을 깨자 길이 나타났다[BreakFirst]

  • 동아일보
  • 입력 2024년 4월 1일 07시 3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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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품절 대란’을 일으킨 ‘냉동김밥’. 브랜드는 다르지만 냉동김밥을 처음으로 개발한 건 조은우 ‘복을 만드는 사람들’ 대표다. 지난달 5일 서울 종로구 동아미디어센터에서 그를 만났다. 홍진환 기자 jean@donga.com


폭우. 경남 하동의 섬진강이 범람하고 화개장터가 침수된 2020년 8월의 어느 날이었습니다. 하동에서 김밥 사업을 하던 ‘복을 만드는 사람들’(복만사) 조은우 대표(43)는 도로를 뒤덮은 빗물을 보며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 공장도 물에 잠겨버렸으면 좋겠다.’

내 안에 포기할 용기조차 없을 땐 외부의 힘으로 포기 ‘당하고’ 싶다는 비겁한 마음이 스미곤 합니다. 조 대표가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2년 걸려 만든 ‘냉동김밥’은 시장의 외면을 받고 있었습니다. 공장이 물에 잠기면 ‘김밥을 세계에 수출하겠다’던 포부도 함께 없던 일이 될 것만 같았습니다.

그때만 해도 주문량이 폭주해 공장을 확대해야 하는 지금 상황을 상상할 수 없었습니다. 기회는 우연히 찾아왔지만, 기회를 잡은 것은 관성을 깨고 2년간 절치부심한 한 조 대표의 노력 덕분이었습니다.
―그동안의 여정이 궁금합니다.
대학에서는 산업디자인을 전공했어요. 전공과 관련된 회사에 취업했지만, 사업에 갈증이 있었죠. 처음엔 외식업에 뛰어들었어요. 프랜차이즈를 갖는 게 꿈이었거든요. 20대에 두 번 고깃집을 차렸고, 그때 번 돈으로 호기롭게 상경했습니다. 죽집을 시작했는데 결국 망했어요. 그때 남은 재산이 1000만 원이었는데, 그 돈을 들고 하동으로 귀촌했습니다. 죽을 만들던 노하우를 살려 이유식 사업을 벌였는데, 공동 창업자들과 의견이 달라 갈라섰습니다. 하동을 대표하는 지역 명물을 만들어보고 싶어 빵과 호떡 사업을 벌였는데 반응은 시원치 않았습니다. 2017년에는 ‘대롱치즈스틱’이란 걸 만들었어요. 꿈이 이뤄지나 싶었습니다. 대구 동성로 1호점을 시작으로 13호점까지 지점이 늘어났고, 고속도로 휴게소 130곳에 입점했어요.

―그런데 왜 갑자기 국내에서는 생소한 냉동김밥을 개발하기 시작하신 거죠?
한창 사업을 키워나가던 때였는데, 2018년 12월쯤이었습니다. 기사를 봤는데, 일본의 무인양품에서 한국식 냉동김밥이 대박이 났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내가 직접 만들어서 수출해볼까?’라는 생각이 냉동김밥의 시작이었습니다. 오랜 기간 사업을 하다 보니 지역 경제 발전에 도움이 되는 것도 기업가의 역할이라는 마음도 생겼는데, 김밥을 만들면 지역 농산물도 충분히 활용할 수 있겠다 싶기도 했고요.

―애써 개발했는데 발매 첫해인 2020년 매출은 4억 원에 불과했다고요. 냉동김밥을 개발하고 시장을 확보하는 과정에서 마주한 가장 큰 어려움은 무엇이었나요?
‘냉동김밥은 아무도 안 먹는다’는 시장의 고정관념이 컸습니다. 냉동김밥은 신선김밥보다 맛이 없고, 그렇기 때문에 가격이 저렴해야 한다는 인식이 바이어들에게 강하게 박혀있었어요. 국가보조사업에 지원해도 떨어지는 이유는 늘 같았어요. 발표가 끝나면 심사관들이 이렇게 묻습니다. ‘같은 가격이라면 굳이 냉동김밥을 먹을까요?’ ‘품질이 좋지만 비싼 냉동 김밥’이라는 제품 자체가 관성을 거스르는 조합이었던 것 같아요. 그나마 관심을 보이는 해외 바이어가 있어도 코로나19(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로 배 정박 기간이 두 달을 넘어가 제품을 보낼 수조차 없었습니다. 그때는 나쁜 생각도 자주 했죠.

경남 하동에 있는 복만사 공장에서 직원들이 김밥을 만드는 모습. 연간 김밥 350만 개를 만들어낸다. 현재 연간 900만 개를 만들 수 있는 규모로 공장을 증설 중이다. 복만사 제공

사실 한국인에게 냉동김밥은 생소한 제품입니다. 지도를 조금만 검색해봐도 방금 만든 김밥을 살 수 있는 곳이 가득합니다. 더군다나 김밥의 유통기한은 상온 7시간, 냉장 36시간입니다. 더 큰 문제는 맛입니다. 해동 뒤 눅눅해진 김, 아삭함이 사라진 채소는 그다지 끌리지 않습니다. 대부분은 냉동김밥을 만들 생각도, 살 생각도 하지 않습니다.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던 냉동김밥의 개발 과정이 궁금합니다.
냉동김밥을 해동하면 김이 젖으면서 김밥이 풀어지고 재료는 눅눅해집니다. 해동해도 터지지 않는 냉동김밥을 만들기 위해 수분을 제어하는 기술이 가장 중요했습니다. 오이처럼 수분이 많은 재료는 제외했고, 당근, 우엉, 유부 등 재료는 최대한 말렸어요. 완전히 말리면 퍽퍽해지기 때문에 신선감을 유지하는 선에서 건조하는 ‘수분 제어 기술’을 연구했죠. 밥과 재료가 수분을 덜 머금게 하도록 김밥을 빠르게 얼리는 ‘급속 냉동’ 기술도 개발했습니다. 김이 가열되면 질겨지기 때문에 적당히 얇으면서 탄력감 있는 김을 고르기까지 시중에 나온 모든 김은 다 먹어봤어요. 해동 시간은 3분을 넘지 않으면서 김밥 가운데까지 충분히 따뜻해질 수 있게 가운데가 옴폭 패여 있는 용기도 직접 개발했습니다.

복만사의 냉동 비건김밥. 김밥은 재료들을 기름에 볶고, 김 겉에 참기름까지 두르기에 평균 열량이 500kcal 를 넘나들지만, 복만사표 냉동 비건김밥 열량은 200~300kcal 수준이다. 복만사 제공

―‘즉석김밥이 최고’라는 세상의 관성을 어떻게 깰 수 있었다고 생각하세요?
냉동을 냉동이라 부르지 않기로 한 겁니다. 냉동김밥이라는 단어 자체에 ‘저렴하고 품질은 다소 떨어지는 냉동 제품’이라는 고정관념이 담겨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걸 깨기로 했죠. 더군다나 처음부터 수출을 염두에 두고 레시피를 개발하다 보니 통관이 까다로운 육류는 빼고 채소를 많이 넣었어요. 자연스럽게 해초 두부, 땡초, 버섯잡채, 우엉 유부, 톳두부 등 건강한 레시피의 ‘비건김밥’이 됐어요. 열량도 대폭 낮췄습니다. 냉동된 밥을 해동하면 전분 노화현상이 일어나서 열량 흡수율이 낮아집니다. 그 원리를 응용해 급속 냉동으로 김밥 열량을 떨어뜨리는 기술을 개발했습니다. 일반 김밥은 500kcal가 넘는데 저희 냉동김밥은 200~300kcal에 불과합니다. 저렴한 냉동식품이라는 분류에서 빠져나와 건강한 ‘웰빙푸드’로 재정의했습니다.
‘복을 만드는 사람들’의 냉동김밥 브랜드 ‘11시45분’ 제품들. 복만사 제공

―냉동김밥을 ‘웰빙푸드’로 재정립한 성과는 어땠나요? 시장의 반응이 오던가요?
메일이 하나 왔는데, 마켓컬리 MD(상품 기획자)였어요. 휴게소에서 저희 냉동김밥 제품을 봤는데, 처음 보는 제품이라 ‘우리가 먼저 팔아봐야겠다’고 생각했대요. ‘내 마지막 동아줄이다’ 싶었어요. 그동안 준비해왔던 대로 ‘저칼로리의 건강한 김밥’이라는 콘셉트의 기획안을 준비했어요. 기존에 팔던 ‘매콤제육’이나 ‘계란김밥’만 강조했다면 계약이 불발됐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결국 다이어터를 타깃으로 한 ‘비건 김밥’이 관심을 받았고, 거래가 시작됐습니다. 이후 윙잇, 쿠캣 등 국내 대형 유통사 18곳에 입점했습니다.

―2020년 복만사 냉동김밥 ‘11시45분’의 수출국은 홍콩 단 한 곳이었습니다.
한국에서 인기를 끄니 해외 판로도 조금씩 뚫리기 시작했습니다. 국내 대형 온라인 마켓에서 판매량 순위권에 오른 제품이라고 하니, 국제식품박람회를 찾은 해외 바이어들도 큰 관심을 보이더군요. 온라인에 달린 ‘무조건 재구매하는 제품이다’ ‘맛있는 다이어트 식품은 처음이다’ 등의 리뷰를 적극적으로 활용했죠. 그렇게 미국, 프랑스, 홍콩 등 12개국에 수출하게 됐습니다.

지난해 8월 복만사 냉동김밥의 영국 진출을 기념해 하동 복만사 공장 앞에서 선적식이 열렸다. 복만사는 영국 H마트에 냉동김밥 10톤을 수출했다.  복만사 제공
지난해 8월 복만사 냉동김밥의 영국 진출을 기념해 하동 복만사 공장 앞에서 선적식이 열렸다. 복만사는 영국 H마트에 냉동김밥 10톤을 수출했다. 복만사 제공


냉동을 냉동이라 부르지 않기로 했습니다.
수출이 시작됐다고는 하지만, ‘KIMBAP’에 대한 해외의 인식은 좋지 못했습니다. 해외 매체에서는 ‘아시안 푸드’를 비하의 소재로 쓰고 있었습니다. 미국 드라마에서는 일본 사케를 두고 ‘땀에 젖은 양말 냄새가 난다’거나, 생선 머리를 넣고 끓인 국에서 ‘쓰레기 맛이 난다’고 조롱하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김밥도 예외가 아닙니다. 아시안 이민자 자녀가 학교에 점심 메뉴로 전통음식을 싸 갔다가 친구들에게 놀림을 당하는 경험을 ‘런치박스 모먼트’라고 부르는데요. 이 경험의 단골 메뉴 중 하나가 ‘KIMBAP’이었습니다.

―해외에서 김은 독특한 식감과 향 때문에 ‘혐오식품’ 취급받곤 하는데요. 해외시장에서 김밥이 잘 팔릴 거라고 예상하셨나요?
수출했던 국가 중에 프랑스와 아랍에미리트 등에서 재발주가 들어왔어요. 저도 의아하더군요. 비이어에게 ‘이걸 외국인들이 왜 사 먹습니까?’라고 물었어요. “스시인줄 알고 먹는다”더군요. 그래서 김밥 대신 ‘코리안 스시’로 이름을 바꾸면 더 잘 팔리겠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이름이 익숙하면 접근하기 쉬우니까요. 그래도 한국의 대표 음식에 ‘스시’라는 이름을 붙일 순 없었어요.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군 복무 다음으로 뿌듯한 게 김밥이란 이름을 고수한 겁니다.

지난해 8월, 한국계 미국인 사라 안은 자신의 SNS에 영상을 하나 올립니다. 1분 남짓한 영상에는 냉동김밥을 시식하는 장면이 담겼습니다. 틱톡에서 1370만 회, 인스타그램에서 880만 회의 조회수를 기록했습니다. 기억하시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이후 북미권에서는 ‘KIMBAP’ 품절 대란이 벌어졌습니다. ‘1인 2줄’ 구매량 제한을 걸 정도로 김밥이 불티나게 팔렸습니다. “드디어 한국 냉동김밥을 손에 넣었다”는 인증 영상이 쏟아졌습니다. 혐오 식품 취급 받던 김밥의 급격한 신분 상승(?)으로 복만사에도 복이 굴러 들어왔습니다. ‘11시45분’의 수출국은 19곳으로 늘었습니다. 매출은 지난해 60억 원까지 치솟았습니다.

틱톡에서 조회수 1370만 회를 기록한 한국계 미국인 틱톡커 사라 안의 냉동김밥 시식 장면. 영상이 화제가 된 뒤 미국 식료품점 체인 트레이더 조에서 판매되고 있는 ‘올곧’의 냉동 김밥은 560여 개 매장에서 2주 만에 품절됐다. 사라 안 틱톡 캡처
틱톡에서 조회수 1370만 회를 기록한 한국계 미국인 틱톡커 사라 안의 냉동김밥 시식 장면. 영상이 화제가 된 뒤 미국 식료품점 체인 트레이더 조에서 판매되고 있는 ‘올곧’의 냉동 김밥은 560여 개 매장에서 2주 만에 품절됐다. 사라 안 틱톡 캡처

―사라 안이 먹은 ‘바바김밥’ 제조사는 ‘올곧’이라는 기업이죠. 여기에 인기가 높아지자 대기업까지 뛰어들었다고요. 시장을 독점하지 못해 아쉬운 마음은 없나요?
냉동김밥이 점점 인기를 끌면서 주문량이 늘어나 우리 공장의 생산력으로는 납품 일정을 맞추기도 어려운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다양한 생산자가 있어 오히려 저희의 공백을 메워줬다고 생각해요. ‘코리안 스시’가 될 뻔한 한국의 김밥이 제 이름인 ‘KIMBAP’을 달고 세계에 널리 알려지게 됐습니다. 그런 점에선 올곧 같은 업체에 오히려 고맙다는 마음도 듭니다.

미국 H마트에 진열된 복만사의 냉동김밥. 복만사 제공


“최고가 돼라.””던 친척의 말이 각인된 것 같아요.
조 대표는 지금까지의 성공에 여러 행운이 따랐다고 합니다. 하지만 사업 실패로 1000만 원을 들고 하동으로 왔을 때까지 조 대표는 오히려 불운의 사나이에 가까웠습니다. 냉동김밥으로 기사회생하기까지 7번이나 실패의 쓴맛을 봤으니까요. 두 번의 고깃집, 죽, 이유식, 빵, 호떡, 치즈스틱까지 7번이나 종목을 바꿔가며 창업했지만 이렇다 할 성공을 거두지 못했습니다. 7번의 실패 뒤 찾아온 성공은 운보다는 도전 정신 때문이었을 겁니다. 칠전팔기는 그를 위한 단어입니다.

―7번의 실패에도 지치지 않고 관성을 깨는 도전을 이어온 원동력은 뭔가요?
어렸을 때 숱하게 부모님께 혼나도 기억에 남는 순간이 있잖아요. 어린 마음에 상처가 됐던 순간이 잊히지 않는 것처럼요. 초등학교 2학년쯤이었을 거예요. 명절에 온 가족이 모였는데, 마당에서 큰어머니가 제 어깨를 잡고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은우야, 뭐든 한 분야에서 최고가 돼라. 세계가 아니면 한국에서, 한국이 아니면 지역에서, 지역이 아니면 친구들 사이에서라도 최고가 돼라.” 그 순간, 그 말이 제게 각인돼 포기하고 싶은 순간에도 나아가게 하는 원동력이 됩니다. ‘한 분야에서는 최고가 돼야 한다’라는 의지가 몸에 배 있는 것 같습니다.

하늘에서 내리는 ‘김밥비’를 보며 환하게 웃는 조은우 대표. 홍진환 기자 jean@donga.com
하늘에서 내리는 ‘김밥비’를 보며 환하게 웃는 조은우 대표. 홍진환 기자 jean@donga.com

―복만사의 목표가 궁금합니다.
최근 투자사 두 곳에서 연락이 왔어요. 볶음밥, 주먹밥 등으로 종목을 넓혀보자고 하더군요. 회사를 키울 기회지만 거절했습니다. 제 철학이 지켜지지 않을 것 같아서요. 농산물은 값싼 중국산으로, 쌀은 미국 칼로스 쌀로 교체하라고 하겠죠. 원가가 비싸도 품질이 우수한 국산 농산물을 사용한다는 게 제 철칙입니다. 위생적인 김밥 양산화 방법을 개발해서 건강하고 깨끗한 김밥을 세계에 수출하고 싶어요. ‘냉동김밥 주제에 4000원씩이나 해?’가 아니라, ‘이렇게 건강하고 맛있는 웰빙푸드가 4000원밖에 안 해?’라는 인식을 세계인에게 심어주고 싶어요. 김밥 하나로 승부를 보는 ‘김밥계의 장인’이 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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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희 기자 j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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