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전망대]권순활/삼성과 현대 명암을 가른것

  • 입력 2003년 8월 24일 17시 4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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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철(李秉喆)과 정주영(鄭周永). 요즘 자주 떠올려보는 이름이다. 이제는 모두 고인이 됐지만 한국경제에 큰 발자국을 남긴 기업인이다.

생전에 영욕(榮辱)과 부침(浮沈)도 겪었다. 빛과 그늘도 있었다. 하지만 삼성과 현대를 세우고 키워 한국이 이만큼이라도 먹고 살 수 있게 된 데 기여한 공로를 지울 수 없다. 삼성의 전자·반도체 사업과 섬유업 진출, 현대의 해외 건설시장 개척과 자동차 수출은 우리 경제를 한 단계 올려놓는 데 큰 획을 그었다.

오랫동안 재계 1위를 놓고 다투었던 삼성과 현대. 그러나 현주소는 너무 다르다.

이병철 창업주가 타계한 뒤 이건희(李健熙) 회장이 이끌고 있는 삼성은 명실상부한 국내 대표기업으로 자리를 굳혔다. 이런저런 논란도 있지만 글로벌 무한경쟁 시대에 삼성이 이 땅에 있다는 것은 한국의 행운이다. 이 정도 국제경쟁력을 지닌 회사가 몇 개만 더 존재한다면 세계 속에서 우리 위상은 한층 높아질 것이다.

반면 현대가 걸어온 길은 대조적이다. 정주영 창업주의 공식 후계자인 정몽헌(鄭夢憲) 회장이 물려받은 전자와 건설, 상선 분야를 축으로 하는 좁은 의미의 현대그룹은 모두 추락했다. 은행을 통해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식으로 공적자금이 투입됐다. 이 가운데 상당액은 세금으로 채워야 할 것이다. 현대에서 계열분리된 자동차와 중공업그룹의 독자생존이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다.

무엇이 오랜 라이벌인 삼성과 현대의 운명을 이렇게 갈라놨을까.

기업 환경 변화 속에서 ‘뛰고 난 뒤 생각한다’는 현대식 경영이 ‘생각한 뒤 뛰어간다’는 삼성식 경영보다 리스크가 컸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창업주 생전에 능력 있는 후계자를 확정한 삼성과 달리 현대는 ‘왕자의 난’으로 대표되는 리더십의 갈등을 겪었다는 점도 간과할 수는 없다.

그러나 결정적인 것은 정치와의 거리였다.

물론 기업이 살아있는 권력과 완전히 등지고 견뎌내기란 한국 풍토에서 힘들다. 정권이 손보겠다고 마음먹고 검찰과 경찰, 국세청과 공정거래위원회를 총동원해 낱낱이 뒤질 때 살아남을 수 있는 회사가 현실적으로 몇 개나 될 것인가.

하지만 이를 감안해도 현대와 정주영-정몽헌씨는 너무 나갔다.

민간기업이 그렇게 수익성 없는 대북(對北)사업에 거액을 쏟아 붓고도 견뎌낼 수 있다면 오히려 기적에 가깝다. 게다가 권력 실세에 갖다 바친 ‘뒷돈’이 드러난 것만도 수백억원이라는 데 이르면 더 할 말이 없다. 현대가 삼성만큼만 정치와의 거리를 지켰더라도 저렇게까지 무너졌을까.

기업과 기업인에게 가장 먼저 요구되는 것은 ‘통일사업’이나 자선사업이 아니다. 경영을 잘해 회사를 키우고 세금과 일자리를 많이 내고 만들어내는 게 최우선의 덕목이다, 어떤 명분을 내걸었던, 잘 나가던 기업을 거덜 내고 임직원과 주주, 국민에게 부담을 지운다면 단순한 실패를 넘어 죄악에 가깝다.

권력에 너무 가까우면 타 죽고 너무 멀면 얼어 죽는다고 한다. 이 가운데도 정말 무서운 것은 타 죽는 것이다. 기업 본연의 활동을 벗어나 정권에 지나치게 다가갔던 현대의 오늘은 생생한 교훈을 던져주고 있다.

권순활 경제부차장 shkw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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