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자유치에도 '함정'있다- 증시 작전 해부

  • 입력 2000년 8월 30일 18시 41분


‘검은머리 외국인을 조심하세요.’

외환위기로 달러가 부족한 상황에서 외자유치는 국내 기업의 최대과제였다.

외자유치는 단순히 자금조달뿐만 아니라 해당기업의 안전성을 외국인투자자들이 인정했다는 의미로 시장에서 받아들여졌다.

그런데 작년말부터 일부 코스닥기업이 국내자금을 해외자금으로 둔갑시켜 외자유치했다고 선전해 주가를 올리고 있다. 외국계자금은 감독기관의 감시망에서 벗어나 있다는 점을 악용하고 있는 것.

얼마전 모창투사 대표 A씨는 화의 탈피를 앞둔 B기업 대표 P씨를 찾아갔다. 그는 해외전환사채(CB) 500만달러를 발행하면 사채업자를 동원해 채권을 사주겠다고 제안했다. P씨 입장에서는 외자유치 공시를 내 주가가 크게 오를 수 있고 A씨는 거액의 수수료를 받을 수 있기 때문. 사채업자는 해외CB 인수 후 주식으로 전환해 시세차익을 낼 수 있어 관련당사자가 모두 이익을 본다.

P씨의 동의를 받은 A씨는 곧바로 작업에 들어갔다.

먼저 말레이시아 케이맨제도 등 조세회피지역에 해외CB를 인수할 기관으로 페이퍼 컴퍼니(역외펀드·V펀드)를 만들었다. 이 회사는 서류상으로만 존재할 뿐 직원도 사무실도 없다.

이후에는 P씨 등 실제로 CB를 인수할 사채업자를 모집했다. 해외유가증권발행에는 주간사증권사가 필요해 평소 잘 알던 S증권도 동원했다.

세부계획이 확정되자 B기업 대표는 곧 해외CB발행 결의 공시를 냈다.

S증권은 일정에 따라 총액인수방식으로 해외CB를 인수해 V펀드에 넘겼다. 대표이사 P씨는 이 중 162만달러를 인수했고 나머지는 사채업자 몫이었다. S증권은 수수료로 3만달러를 받았고 A씨는 P씨와 사채업자들로부터 중개수수료를 받았다.

P씨는 이후 언론과 본사 인터넷 홈페이지를 통해 “회사의 사업성이 세계적으로 인정받아 유로시장 공모를 통해 500만달러의 외자를 유치했다”고 발표했다.

이러한 가짜 외자유치를 통해 주가의 든든한 버팀목을 만든 후 P씨는 차명형식으로 갖고 있던 우리사주조합 주식 27만주를 처분해 약 24억원을 벌었다.

물론 외자유치 공시를 믿고 투자한 순진한 개인들은 많은 손해를 봤다.

증권업계 관계자는 “특별한 기술력도 없고 인지도가 낮은 코스닥기업이 해외공모를 통해 수천만달러를 유치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며 “대부분 대주주를 비롯한 국내자금이 나갔다고 보면 된다”고 말했다.

코스닥기업의 이러한 행태는 사실 거래소기업에서 배운 것.

올 2월 금융감독원은 현대건설 현대전자 삼성물산 제일제당 ㈜대우 한진해운 등 6개 기업이 부채비율 200%를 맞추기 위해 해외CB 및 신주인수권부사채(BW) 11억1000만달러를 발행, 이 중 7억4000만달러를 국내에 판매한 사실을 적발했다. 소문으로만 무성했던 ‘검은 머리 외국인’의 실체가 드러난 것.

이들도 B기업과 똑같이 역외펀드를 이용했으며 다른 점은 규모가 크고 외국금융기관이 브로커로 개입했다는 것이다.

최근 논란을 빚고 있는 코스닥기업 G사도 해외CB 2000만달러를 발행했으나 이 중 일부를 대주주가 말레이시아에 만든 역외펀드에서 인수해 의혹을 받고 있다.

이제 외자유치를 했다고 무조건 투자해서는 금물이다. 옥석을 가려야 한다.

<김두영기자>nirvana1@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