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일본 교토 우지강 현수교에 선 ‘제1회 윤동주 포럼’ 참가자들. 윤동주 시인은 교토 도시샤대에 재학 중이던 1943년 초여름 이곳에서 마지막 사진을 남기고 얼마 지나지 않은 7월 14일 일본 경찰에 체포됐다. 연세대 윤동주기념관 제공
“윤동주 시인(1917∼1945)은 지금 저희 젊은 세대보다 더 국제적인 삶을 사셨더라고요. 한중일 3국을 매개하는 인물이란 점에서도 상징성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일본 후쿠오카의 한일 다문화가정에서 태어난 서주훈 씨(33·연세대 사학과)에게 윤 시인은 ‘원조 한류맨’으로 다가온다. 서 씨는 16일 윤동주 서거 80주기를 앞두고 “28세에 요절한 조선 시인을 한국은 물론 일본의 도쿄와 교토, 후쿠오카 등 각지에서 지금까지도 기릴 만큼 일본인에게도 큰 영감을 줬다는 게 놀랍다”고 했다.
우리의 가슴속 ‘영원한 청년’ 시인 윤동주. 그와 비슷한 연배인 청년 세대에게 윤동주의 시는 어떻게 느껴질까. 윤동주기념사업회가 올해 처음 개최한 ‘제1회 윤동주 평화포럼’에 참가한 2030세대 대학생 3명에게 윤동주 시를 읽는 이유를 들어봤다. 해당 포럼은 서 씨 등 사전 선발된 연세대 학생 14명이 참가해, 시인의 행적을 답사하며 윤동주의 삶과 문학을 배웠다. 지난달엔 윤 시인의 일본 모교인 릿쿄대와 도시샤대도 다녀왔다.
서 씨는 “일본 유학 시절 쓴 ‘쉽게 씌어진 시’(1942년)를 읽으면 ‘육첩방은 남의 나라’ 같은 시구절에서 금세라도 ‘다다미 6장’을 깐 그의 조그만 하숙방으로 초대된 느낌을 받는다”며 “그가 느꼈을 문화적 이질감과 현실에 대한 고뇌가 절절하게 다가왔다”고 했다. 1917년 북간도 명동촌에서 태어난 윤 시인은 서울에서 연희전문학교(현 연세대)를 졸업한 뒤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와 교토에서 수학했다. 경찰에 붙잡힌 뒤 안타깝게도 광복 직전인 1945년 2월 16일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옥사했다.
포럼 참가자들은 윤 시인에게 묘한 ‘동질감’을 느낀다고 입을 모았다. 시스템반도체공학을 전공하는 송준서 씨(23)는 “알면 알수록 윤동주는 완벽하고 신화적인 영웅으로 보이기보다는, 그냥 진짜 주변에 있을 법한 친구로 느껴졌다”며 “엄혹한 일제강점기에 자신의 문학을 계속 이어 나가면서 많이 슬퍼하면서도, 그래도 버텨 나갔던 친구로 여겨지면서 오히려 더 배울 점이 많았다”고 말했다. 그는 연세대 윤동주기념관에서 도슨트 봉사 활동도 하고 있다.
“윤동주가 살면서 찾고자 했던 ‘의미’가 도대체 뭐기에 죽기 전까지 지키면서 살았는지를 저도 한번 알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시인에 대해서 알면 알수록 제가 찾고 있는 의미에도 좀 가까워지지 않을까요.”
포럼 참가 학생 중 유일한 1학년생인 신지민 씨(20)는 평소에도 “손바닥 크기의 윤동주 시집을 항상 가방에 넣고 다니며 읽는다”고 했다. 특히 ‘편지’와 ‘돌아와 보는 밤’을 좋아한다고 한다. 어지러운 세상 속에서도 사색하는 느낌을 담고 있어서다.
“문학 작품을 읽을 때 감수성이 풍부해진다고 얘기하잖아요. 그런데 그 감수성은 문학에만 국한되는 게 아니라 인간관계와 사회에 대한 생각을 하는데도 확장될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런 면에서 윤동주의 시가 주는 울림은 더욱 크게 느껴져요.”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