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때 뽑은 흰머리 지금 아쉬워’ 노년의 기쁨과 슬픔 해학으로 버무리다[손효림의 베스트셀러 레시피]

  • 동아일보
  • 입력 2025년 2월 13일 11시 00분


[손효림의 베스트셀러 레시피]
많은 사람들에게 뜨거운 사랑을 받는 베스트셀러. 창작자들은 자신이 만든 콘텐츠가 베스트셀러가 되길 꿈꾸지만, 실제로 실현될 가능성은 극히 낮다. 이 희귀한 확률을 뚫고 베스트셀러가 된 콘텐츠가 탄생한 과정을 들여다본다. 창작자의 노하우를 비롯해 이 시대 사람들의 욕망, 사회 트렌드 등을 확인할 수 있다.

‘산책하는 길/경로를 바꿨다간/못 돌아온다’
‘재활 치료 중/꼴찌는 면하려고/죽도록 노력’

노년의 희로애락을 재치있게 그린 시들이다. 올해 1월 출간된 ‘그 때 뽑은 흰머리 지금 아쉬워’(포레스트북스)에 담겼다. 이 책은 나온 지 한 달 만에 1만 권이 판매됐다.(국내 출판계의 베스트셀러 기준은 책 판매량 1만 권이다.) 지난해 1월 출간돼 5만 권 넘게 판매된 ‘사랑인 줄 알았는데 부정맥’에 이은 두 번째 책이다. 두 책 모두 시집으로는 이례적인 기록이다.

‘그 때 뽑은 흰머리 지금 아쉬워’ 책표지.                             포레스트북스 제공
‘그 때 뽑은 흰머리 지금 아쉬워’ 책표지. 포레스트북스 제공
‘그 때 뽑은 흰머리 지금 아쉬워’는 일본 사단법인 전국유료실버타운협회에서 매년 열고 있는 ‘실버 센류’ 공모전에 당선된 최신작을 모았다. 제목도 수상작에서 뽑았다. 일본 정형시 중 하나인 센류(川柳)는 5-7-5의 총 17개 음으로 된 짧은 시로, 풍자와 익살을 담은 게 특징이다. 전국유료실버타운협회는 2001년부터 매년 나이 듦을 주제로 하는 ‘실버 센류’ 공모전을 열고 있다. 2023년 공모전에는 1만 1000수가 넘는 작품이 출품될 정도로 참여 열기가 뜨겁다. 수상작을 모아 낸 시집 시리즈는 일본에서 누적 판매부수가 100만 권을 넘어서며 큰 인기를 얻고 있다.

이 책을 국내 출간한 서선행 포레스트북스 편집이사(48)를 서울 영등포구 포레스트북스에서 최근 만났다. 서 이사는 “‘사랑인 줄 알았는데 부정맥’이 예상치도 못하게 큰 사랑을 받아 후속작을 냈다”고 했다. 번역도 첫 책과 마찬가지로 일본 문학 전문가인 이지수 번역가가 맡았다.

“기다렸다가 책을 샀다는 독자들이 많아요. 첫 책에 비해 마케팅은 절반도 하지 않았는데 반응이 곧바로 왔어요. ‘책을 읽고 오랜만에 엄마와 한 시간 넘게 대화했다’는 분도 있어 뿌듯합니다.”

부모님이나 다른 어르신 선물용으로 샀다는 리뷰도 많다. 읽는데 부담이 없다는 것도 매력적인 요소로 꼽힌다.

최신작인만큼 팬데믹으로 인한 변화, 인공지능(AI), 셀프 계산대에서 겪는 해프닝 등 최근 흐름을 담은 작품이 적지 않다. ‘코로나처럼/아내도 몇 번이나/변이했구나’, ‘AI에게/ 저세상 가는 길/물어본다’, ‘셀프 계단대 앞/얼어붙은 사람들/죄다 할배들’이 대표적이다.

노년의 일상을 발랄하게 담아 웃음 터지게 만드는 힘은 여전하다. ‘치매 예방차/구입한 그 책/벌써 세 권째’, , ‘자기소개 때/돌아가며 말한다/이름 고향 취미 지병’, ‘신경 쓰는 것/옛날에는 인맥/지금은 맥박’, ‘노래방에서/후렴구 열창 도중/빠져버린 틀니’가 그렇다.

‘그 때 뽑은 흰머리 지금 아쉬워’ 에 수록된 시. 포레스트북스 제공


‘그 때 뽑은 흰머리 지금 아쉬워’ 에 수록된 시.          포레스트북스 제공
‘그 때 뽑은 흰머리 지금 아쉬워’ 에 수록된 시. 포레스트북스 제공

‘손주에게 외친다/“마음껏 쓸어 담아!”/다이소에서’, ‘보이스 피싱/당할 정도의 돈이/내 통장엔 없다’며 가벼워진 지갑 사정도 명랑하게 노래한다. 인생을 담담하게 관조하고(‘아 늙었네/하지만 괜찮아/다 늙었어’), 나이 듦에 관한 환상에 대해 일갈하기도 한다(‘나이 들면/둥글어진다는 말/어쩌면 거짓말’).
서 이사는 “센류는 웃음과 슬픔이 닿아 있어 그 감성에 공감하는 분들이 많은 것 같다”고 했다. 장석주 시인은 추천사에서 “한바탕 웃고 나니 차가운 심장은 더워지고 공허한 마음은 감동으로 충만해진다”고 했다. 오은 시인은 “늙음을 한탄할 때조차 다 늙어서 괜찮다는 긍정을 잃지 않고 지병과 먹는 약이 없으면 대화가 불가능함을 인정하는 해학이 가득하다”고 평가했다. 나태주 시인은 “깨달음과 지혜를 간명한 문장으로 표현한 글”이라고 소개했다.

‘그 때 뽑은 흰머리 지금 아쉬워’ 에 수록된 시. 포레스트북스 제공


‘그 때 뽑은 흰머리 지금 아쉬워’ 에 수록된 시.                                            포레스트북스 제공
‘그 때 뽑은 흰머리 지금 아쉬워’ 에 수록된 시. 포레스트북스 제공

서 이사는 일본 서점에서 ‘사랑인 줄 알았는데 부정맥’을 보고 매료된 후 끈질기게 애쓴 끝에 국내 출간을 성사시켰다. 두 번째 책도 성공해 시리즈로 안착됐다. 후속작도 준비하고 있다.
“실버 센류 공모전 수상작을 모은 첫 책이 일본에서 2012년에 나온 ‘사랑인 줄 알았는데 부정맥’이고 최신책이 2023년에 나온 이 책이에요. 일본에서는 수상작을 모아 꾸준히 책을 냈는데, 그 중에서 특히 반응이 좋은 시들만 따로 모은 이른바 베스트컬렉션이 있어요. ‘왕중왕’이라고 할까요. 이 책은 올해 연말이나 내년 초에 출간하려고 합니다.”
그는 새로운 유형의 책을 선보이려 노력하고 있다. 작은 달력처럼 넘기며 하루 하나씩 우리말 단어를 익히는 ‘이은경쌤의 초등어휘일력 365’(2022년)가 대표적이다.
“아들이 어느 날 ‘책에 오타가 있다’고 가져왔어요. ‘볼 멘 소리를 한다’는 문장을 가리키며 ‘볼펜 소리를 한다’를 잘 못 쓴 거라고 당당하게 말하는 거예요. 깔깔 웃다가 떠올렸어요. 매일 단어를 익히게 해야겠다고요. 책을 많이 읽으라고 아이에게 아무리 얘기해도 잘 안 되는 게 현실이잖아요.”
주위에서는 “영어 단어도 아닌데 판매가 되겠느냐”는 우려가 나왔다. 하지만 출간 후 20만 권 넘게 팔렸다. 역시 달력처럼 만든 ‘어른의 어휘일력 365’(2024년)도 2만 권 이상 판매됐다.
“기존에 접하지 못한 콘텐츠나 색다른 형태의 책을 꾸준히 선보이며 독자층을 넓히고 싶어요. 다양한 장르의 콘텐츠를 살펴보고, 서점에서 책을 계속 사며 독자의 입장에서 생각하려 합니다. 여러 경험과 감각이 쌓여야 ‘제3의 지대’를 발견하는 눈이 생기니까요.”

■‘그 때 뽑은 흰머리 지금 아쉬워’(2025년·포레스트북스)는….
일본 사단법인 전국유료실버타운협회가 2001년부터 매년 개최하고 있는 ‘실버 센류’ 공모전에 당선된 최신작을 모았다. 일본 정형시 중 하나인 센류(川柳)는 5-7-5의 총 17개 음으로 된 짧은 시로, 풍자와 익살을 담았다.
펜데믹과 셀프 계산대 확산으로 달라진 일상을 그린 작품이 적지 않다. ‘오래간만에/마스크를 벗으면/손주가 운다’, ‘할 줄 몰라요/가까이도 안 가요/셀프 계산대’가 그렇다. ‘아픈 데 찾으니/여기 저기 거기/어라 전부네’처럼 여러 질병을 갖게 되는 현실마저 유머러스하게 읊은 시도 상당수다.
‘동창회에서/이름 맞히기 놀이로/모두가 화기애애’, ‘몰래 건네받은/고위험 아르바이트/손주의 숙제’, ‘뜨는 해보다/우는 닭보다/빠른 내 아침’은 웃음과 공감을 자아낸다.
다가오는 죽음 앞에서도 여유를 잃지 않는다. ‘자식이 내 사진/찍으니 걱정된다/여기 병실인데’, ‘마음껏 보정했더니/퇴짜 맞아버린/내 영정 사진’, ‘물건 정리/하려다가 시작된/유품 나눔 행사’가 그렇다. ‘우리 마누라/옛날엔 미녀/지금은 마녀’, ‘저승에서는/말도 걸지 말라는/아내의 엄명’처럼 아내 앞에서 작아지는 스스로를 해학적으로 그린다.
노년의 삶에 대한 예리한 관찰과 절묘한 표현에 무릎을 치게 된다. 유쾌하면서도 묵직한 내공은 진한 여운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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