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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문화

조선 판타지에 양념 더한 정보라식 K문학 해석법[이호재의 띠지 풀고 책 수다]

입력 2022-05-28 03:00업데이트 2022-05-28 0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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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칼/정보라 지음/312쪽·1만4800원·아작
이호재 기자
19일 오전 ‘저주토끼’(Cursed Bunny·아작)의 정보라 작가(46)에게 메시지가 왔다. 26일(현지 시간) 영국에서 열리는 부커상 시상식에 참석하기 위해 런던으로 떠난다는 안부 인사였다. 그는 앞으로의 일정에 대해 설명하고 이렇게 덧붙였다. “한국문학 열심히 홍보하고 오겠습니다.”

‘저주토끼’의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수상은 불발됐지만 최종 후보에 오른 후 정보라의 작품세계는 세계문학의 관점에서 평가받았다. 그는 미국 예일대에서 러시아 동유럽 지역학 석사, 인디애나대에서 슬라브 문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러시아 문학을 번역하는 그의 삶이 현실과 환상이 뒤섞인 그의 ‘마술적 사실주의’에 영향을 끼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의 작품세계에 한국문학의 영향이 적었다고 할 수는 없다. 그는 중고등학생 때 이상문학상 수상 작품을 탐독하며 자랐다. 그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미친 작가는 한국 현대문학을 대표하는 거장인 고 박완서(1931∼2011)다. 정보라는 박완서의 작품을 읽으며 섬세한 감정을 그리는 법을 배웠다.(공교롭게도 올해 ‘저주토끼’와 함께 부커상 1차 후보에 오른 연작소설집 ‘대도시의 사랑법’의 박상영 작가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작가도 박완서다. 박완서의 작품을 읽고 자란 한국 작가들이 연달아 영국에서 인정받은 셈이다.)

공상과학(SF) 장편소설 ‘붉은 칼’ 역시 정보라의 작품세계가 한국문학에 토대를 두고 있다는 점을 증명한다. 이 책은 1654년, 1658년 등 두 차례 일어난 청나라·조선 연합군과 러시아군의 충돌인 나선정벌에 관한 기록을 모티브로 삼았다. 2차 나선정벌 당시 조선군을 이끈 지휘관 신유(申瀏·1619∼1680)는 당시 상황을 일기인 북정록(北征錄)으로 썼다. 신유의 후손들은 사실 관계에 집중한 북정록에 허구적 상상력을 덧붙여 여러 작품을 남겼다. 특히 ‘북정일기’는 당시 빈약했던 조선의 병력규모와 청나라에 굴욕적이던 조선의 상황을 마치 소설처럼 생생하게 재구성했다. 정보라는 이 기록을 찾아 읽다가 처음 러시아군을 만났을 때 조선 군인들의 기분이 어땠을까 상상하며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실제로 소설엔 당시 조선 군인들이 느꼈을 법한 여러 감정이 녹아 있다. 매번 강대국에 휘둘리는 약소국 국민의 고통, 정체조차 모르는 적을 만났을 때의 두려움, 억압받아온 역사를 바꾸고 싶은 욕망…. 소설은 겉으론 외계인의 행성을 정벌하기 위해 지배계층이 벌인 전쟁에 끌려 간 피지배계층의 투쟁기를 담았지만, 안으론 조선시대 백성의 염원을 담은 ‘판타지 소설’에 기반을 두고 있는 셈이다.

‘저주토끼’가 유명해지면서 이 책 역시 영국에서 출간될 계획이다. 이번에도 번역은 ‘저주토끼’의 허정범(안톤 허·41) 번역가의 손을 거친다. 조선인의 마음이 담긴 SF 장편소설에 대한 해외 독자들의 평가는 어떨지 궁금하다.


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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