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뒷날개]철학이 어려운 게 아냐 번역어가 어려운 거지

  • 동아일보
  • 입력 2022년 2월 2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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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한국어로 철학하기/신우승, 김은정, 이승택 지음/224쪽·1만3000원/메멘토


“선생: ‘배우는 족족 내 것을 만들면 기쁘지 않을까!’”

2011년 출간된 논어해설서 ‘한글 논어’(올재클래식스)는 공자(기원전 551∼기원전 479)의 가르침을 전하는 논어 첫 문장을 이렇게 번역한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子曰)’를 놀랍게도 ‘선생’으로 압축해 번역한 것. 그 결과 공자님이 메신저 대화창의 친구로 변한다.

인공지능(AI)이 어지간한 외국어는 다 번역해주는 시대에 인간의 번역에는 일대일 직역 이상이 요구된다. 대중 철학서인 이 책의 저자들은 그냥 쓰지만 이해하기 어려운 번역어를 과감하게 바꾸자고 주장한다. 서양철학을 공부하는 학문 공동체 ‘전기가오리’의 운영자 신우승이 새 번역어를 제안하고, 철학 연구자 김은정과 이승택이 이를 검토하는 방식으로 함께 썼다. 논쟁적인 읽기라는 목표를 내건 메멘토 출판사의 ‘나의 독법’ 시리즈 두 번째 책이다.

필요충분조건을 다룬 장을 보자. 인간과 포유류는 무슨 관계일까. 인간이라면 누구나 포유류이지만, 포유류라고 해서 다 인간은 아니다. 즉, 포유류는 인간이기 위해 필요한 조건일 뿐 충분한 조건은 아니다. 이때 필요조건을 ‘필수조건’으로 번역하자는 제안이 나온다. 정확한 한국어로는 인간이기 위해 포유류일 필요가 있는 게 아니라, 포유류인 게 필수이기 때문이다. 필수조건이라는 새 번역어가 중학교 때부터 헷갈렸던 수학 개념을 이해하게 도와준다.

번역어 하나를 바꾸면 언어 전체가 흔들린다. 필수조건의 반대말 ‘비필수조건/비필수적이다’는 ‘불필요조건/불필요하다’보다 자연스럽지 않다는 반론에 제안자는 어색하더라도 의미가 정확한 쪽을 택하겠다고 답한다. 번역어 토론이라는 형식은 독자에게 열려 있어서 나도 참여하겠다는 욕망 또는 책임을 느끼게 한다.

프랑스 철학자 데카르트(1596∼1650)가 진리 인식의 기준으로 내세운 조건인 ‘명석판명’도 이 책은 ‘분명하고 명료한’으로 번역하자고 제안한다. 나에게는 ‘맑고 또렷한’이 더 쉽게 다가오는데 저자들의 의견이 궁금하다. 이들은 독일 철학자 이마누엘 칸트(1724∼1804)가 제시한 개념 ‘transcendental’을 ‘초월론적’으로 번역하자는 데 만장일치를 본다. 하지만 칸트는 영어가 아니라 독일어로 철학을 했다는 사실과 ‘초월론적’이라는 번역어가 일본에서 처음 제안되었다는 사실을 밝히지 않은 점이 의아하다.

한국어로 철학하는 일은 학계의 연구와 콘텐츠 시장 사이에서 일어난다. 학문이 앞선 공부 위에 계속 쌓아가는 일이라면 콘텐츠는 최종 소비자의 눈높이에 맞춰야만 팔린다. 철학 교육은 ‘서비스’여야 한다고 분명하게 주장하는 전기가오리 모델은 출판업계에서 단연 벤치마킹 대상이다.



신새벽 민음사 편집부 인문사회팀장
#철학#번역어#인공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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