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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문화

4년간 문맹퇴치운동 추진… 편지 한장 못쓰던 10만명 한글에 눈떠

권영민 서울대 명예교수·미국 버클리 캘리포니아대 겸임교수
입력 2020-04-21 03:00업데이트 2020-04-21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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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 100주년 기획/동아일보 100년 문화주의 100년]
<5> 우리말과 글을 지켜내다
동아일보는 일제의 억압 속에서 우리말과 한글을 지키고자 노력했다. 왼쪽 사진은 1931∼1934년 개최한 농촌계몽운동 ‘브나로드 운동’의 포스터. 오른쪽 위 사진은 새로운 한글 맞춤법을 처음으로 적용한 1933년 4월 1일자 동아일보. 그 아래는 문맹퇴치 운동 교재 ‘한글공부’의 표지와 내용이다. 동아일보DB
권영민 서울대 명예교수·미국 버클리 캘리포니아대 겸임교수
동아일보는 일제 강점이라는 고통스러운 시대적 상황 속에서 우리말과 글을 지켜내는 데 늘 앞장섰다. 일제는 강압적 식민지 문화정책을 통해 우리말과 글에 대한 교육을 제한했다. 일본어를 ‘국어’라는 과목으로 소학교에서부터 전면적으로 가르쳤으며 우리말 교육은 ‘조선어’라는 이름으로 제한적으로만 허용했다. 이중 언어 교육정책은 일본어의 정착과 확산을 위한 일시적 방편에 불과했다. 일제 강점 말기에는 일상적인 우리말 사용을 엄격하게 금지함으로써 민족어로서의 한국어 자체를 말살하고자 했다.

동아일보는 창간 이후 우리말과 글에 적극적인 관심을 보였다. 1921년 민간 학자들을 중심으로 조선어연구회(뒤에 조선어학회로 개칭)가 발족하자 이를 지지하는 사설을 통해 언어가 모든 문화 활동의 근본임을 천명하고 조선의 문화 발전이 조선어의 발전에 기초한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이후 조선어연구회의 활동을 널리 보도하면서 우리말과 글이 당면한 여러 문제를 사설로 심도 있게 논의했다.

보통학교에서 조선어 교육을 확대할 것을 요구했고, 보통학교용 교과서를 모두 조선어로 만들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다. 어법과 표기 방식의 통일 문제에 관해 전문가들의 논설을 싣는 한편 우리말과 글에 대한 연구를 사회적으로 지원할 것도 주문했다. 1926년은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반포한 지 480주년이 되던 해였다. 조선어연구회가 이 뜻깊은 해를 맞이해 기념식을 갖고 ‘가갸날’을 정했을 때 동아일보는 축하 사설을 통해 민족의 문자로서 한글의 중요성을 주목하면서 한글을 중심으로 민족의 정신적 통일을 추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동아일보는 1928년 4월 창간 8주년 기념사업으로 ‘문맹타파운동’을 준비하면서 한글운동의 실천적 주체로 앞장서기 시작했다. 이 획기적 사업은 인구의 8할에 가까운 문맹을 줄이고자 하는 계몽운동인 동시에 일본어로 유입되는 일본 제국의 문화에 맞서기 위한 탈식민운동을 실천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편지 한 장 쓰지 못하고 심지어 상회의 간판과 정거장 이름 하나 몰라본다는 것은 얼마나 답답한 일입니까. 이와 같이 가엾은 동포가 우리 조선에는 얼마나 많습니까.’

이런 격문을 내걸고 동아일보는 전국의 지국·분국을 총동원해 문맹퇴치운동을 실천할 계획을 세웠다. 독자들에게 무료 배부할 한글 교육 자료도 인쇄했고, 문맹퇴치 광고 전단지와 깃발을 제작했으며, 많은 전문가를 초빙해 강연회를 개최할 준비까지 마쳤다. 그러나 이 운동은 ‘사상성’을 문제 삼은 총독부에 의해 실행 직전 금지당했다. 일제 경찰은 한글 교육 자료마저 모두 압수했다.

동아일보는 여기에 굴복하지 않았다. 1931년 여름 ‘학생 하기 브나로드 운동’이라는 이름을 내걸고 농촌계몽운동을 다시 계획했다. 이 운동은 19세기 러시아에서 유행했던 ‘브나로드(민중 속으로)’ 운동에서 착안한 것으로, 한글 강습을 중심으로 하면서도 보건 위생과 학술 강연 등을 프로그램에 포함시켰다.

학생들이 계몽운동의 자원봉사자로 나섰다. 중학교 4, 5학년생을 주축으로 하는 학생계몽대가 한글 강습과 기초적인 숫자 계산법의 강습을 맡았다. 전문학교 학생들은 보건 위생과 학술 강연을 담당했다. 학생 기자대는 계몽운동을 기록하고 널리 알리는 역할을 했다. 동아일보는 한글 강습을 위한 소책자 ‘한글공부’(이윤재 편)와 숫자 계산법에 관한 기초 안내서 ‘일용 계수법’(백남규 편)을 자체 제작해 무상으로 제공했다.

이렇게 치밀하게 계획한 ‘학생 하기 브나로드 운동’은 시행 첫해부터 큰 호응을 불러일으켰다. 자원봉사 학생 423명이 전국 142개 지역에서 계몽 활동을 벌인 결과 농민 1만여 명이 한글과 숫자 계산법을 익혔다. 동아일보의 문맹퇴치운동은 4년에 걸쳐 지속되면서 약 10만 명이 한글에 눈을 뜨게 만들었다. 참가자들의 적극적 태도와 치밀한 실천 계획이 조화를 이룬 덕분이었다. 식민지 상황에서 우리말과 글을 지키고자 하는 민족의식이 그 속에 담겨 있음을 알 수 있다.

동아일보는 이와 병행해 조선어학회의 전문적인 연구 활동을 후원하면서 맞춤법과 문법의 통일을 준비하기 위한 ‘한글 강습회’(1931년)를 주최했다. 이미 한글을 배운 이들이 바른 우리말 문법과 맞춤법을 제대로 익힐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또 다른 과제였기 때문이다. 한글 강습회는 전국 주요 도시를 순회하며 열었는데, 조선어학회의 권덕규 김선기 김윤경 신명균 이갑 이극로 이만규 이병기 이상춘 이윤재 이희승 장지영 최현배 등 저명한 국어학자들이 모두 참여했다. 강습회 내용은 동아일보 지상에 그대로 중계했다. 학자들은 우리말의 현상을 일일이 점검하면서 수강생들과 의견을 교환했고, 맞춤법의 체계화 방향을 잡아나갔다.

‘한글 강습회’가 성황 속에 끝나자 동아일보는 계속해 조선어학회 회원들을 중심으로 ‘한글 좌담회’를 주최했다. 이 좌담회에서는 통일된 맞춤법의 내용을 검토하면서 한자 표기 문제와 가로쓰기의 채택 여부, 우리말의 순화 방안 등 당면 과제에 대해 의견을 나눴다.

좌담회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뒤에는 한글 맞춤법 대토론회를 1932년 11월 5일부터 사흘간 사옥에서 개최했다. 조선어학회는 준비해온 한글 맞춤법의 여러 규정을 토론회에서 처음으로 공론에 부쳤고, 이후 맞춤법 통일안을 내부적으로 확정했다. 동아일보는 새로운 맞춤법을 곧바로 받아들여 신문 사설과 연재소설 등의 편집에 적용했다.

새 맞춤법에 독자들이 호응하자 1933년 4월 1일 창간 13주년 기념일을 맞아 새로운 한글 맞춤법을 전체 지면에 적용했다. 내부적으로 준비해온 새로운 활자로 편집을 쇄신했다. 특히 4월 1일자 부록으로 ‘신철자편람’을 제작해 배포함으로써 조선어학회의 공식 발표 전 새 한글 맞춤법의 대강을 독자에게 널리 알렸다. 동아일보는 조선어학회가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그해 10월 최종 확정해 발표하자 제487주년 한글날 부록으로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20만 부 인쇄해 국내뿐 아니라 만주와 일본 등지에 널리 배포했다.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통해 우리말과 글이 규범과 체계를 갖춘 것은 식민지 상황에서 이루어낸 빛나는 문화적 성과로 기록할 수 있다. 통일안의 완성은 우리말과 글을 온전히 지키고자 앞장섰던 동아일보의 후원에 힘입은 것이었다. 동아일보는 이를 가장 앞서 신문 편집에 실제 적용했고, 사회에 널리 보급했다.

1945년 광복을 맞아 한국은 민족어를 완전하게 회복했다. 서구 제국의 식민 지배를 오래 견뎌야 했던 여러 피식민 민족들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독립 국가로 새로 태어났음에도 대부분 지배 제국의 언어로부터 벗어나지 못했다. 아프리카 대륙의 여러 민족들은 자신들의 언어를 잃고 영어와 프랑스어 등을 대신 사용하게 됐으며, 중남미 지역 또한 서구 제국의 언어 권역으로 휩쓸리고 말았다.

그러나 한국의 경우는 전혀 달랐다. 일제 강점의 고통과 강압적인 ‘조선어 말살정책’으로 말과 글을 빼앗기는 수난을 겪었지만 광복과 함께 일본어의 질곡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끈질기게 지켜온 우리말과 글을 기반으로 새로운 국가와 제도를 만들어냈다. 우리말과 글을 통해 온전한 교육을 폭넓게 실시했고 고도의 지식과 기술을 엄청난 규모로 축적했으며 민족의 역사와 문화도 눈부시게 발전시켰다.

오늘날 한국인은 누구나 우리말과 글을 통해 새로운 지식과 정보를 공유하고 확산시키며 또한 창조할 수 있다. 새로운 민족문화의 창조와 학문 연구의 가능성이 무한히 열려 있다. 이 놀라운 저력이 우리말과 글에서 비롯된 것임은 물론이다. 바로 이것이 동아일보가 지난 100년간 꿈꾸었던 문화적 민주주의임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권영민 서울대 명예교수·미국 버클리 캘리포니아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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