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고흥은 반도다. 그곳에서 태어난 화가 천경자(1924∼2015)는 말했다. 삼면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사람 가슴을 못 견디게 설레게 했다고. 지난달 고흥반도 최남단 도화면의 제일 남쪽 섬 지죽도로 향하는 기자 마음도 마찬가지였다. 뭍과 연결된 지죽대교(지호대교)로 가지 않고, 어렵게 얻어 탄 뱃머리에서 바람을 가르며 가는 길이어서 더욱 그랬다. 녹동항에서 떠난 지 30여 분 지났을까. 좌현 쪽 김 양식장 너머로 보였다. 울산바위가.
일몰 무렵 고흥 녹동항에서 바라본 소록대교. 윤슬 같은 구름이 잔잔히 빛난다.
● 늠름하면서도 단아하다
물론 그럴 리 없다. 설악산 울산바위가 수천만 년 만에 다시 발걸음을 남쪽으로 내디뎠을 리는 만무하다. 그러나 눈앞에 드러난 것은 최고 높이 100m, 넓이 200m 남짓한 거대한 암벽이다. 하나의 큰 바위처럼 보이는데 다시 보니 커다란 암석 덩어리 네댓 개가 어깨를 겯고 앉아 있는 듯하다.
드러난 부분만 그렇다. 바다 위 10∼20m의 해안단구, 그 위로 약 80m 높이의 곰솔과 굴참나무 숲 지대까지 합치면 위아래 길이 200m 남짓한 암벽이다. 나무들은 바위 위에 쌓인 흙에서 자랐을 터다. 웅장한 화강암 봉우리 6개로 이뤄진 울산바위가 바다 위로 솟았다 할 만도 하지 않겠는가.
암벽은 회백색과 베이지색이 섞인 빛깔을 띤다. 카메라를 줌인해서 들여다보니 단순한 바위가 아니다. 주상절리다. 제주도 중문 해안에서 보는 주상절리처럼 검은색을 띠지는 않는다. 현무암이 아니라 화산재 같은 화산 분출 물질이 퇴적해 생긴 응회암이어서다.
네댓 개 응회암 봉우리마다 각이 넷 이상 진 돌기둥 수십 개가 다발을 이루고 서 있다. 길이가 서로 다른 대나무 십여 개를 둥글게 이어 붙여 소리를 내는 전통 관악기 생황을 떠올리면 이해하기 쉬울 터다. 다만 그 대나무 원 안에 대나무를 촘촘히 채워 넣은 형상이다.
전남 고흥 지죽도 남쪽 사면에 금강죽봉이 우뚝 서 있다. 고고하면서도 단아한 주상절리 암봉이 먼바다를 바라본다. 굵은 대나무들이 서로 어깨를 겯고 있는 듯, 혹은 굳건하면서도 자비로운 본존불의 자태인 듯 보인다.지죽도에서 가장 높은 태산(큰산)의 남서쪽 사면 금강죽봉(金剛竹峰)이다. 바다를 향해 거의 꼿꼿하게 떨어져 내리는 절벽이다. 봉분이나 완만히 이어지는 언덕 같은 섬들 사이에서 하늘을 향해 날카롭게 직립한 자세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옷깃을 여미게 한다. 같은 배에 탄 일행 누구도 탄성 하나 내뱉지 않는다. 숨을 죽인다. 침엽수 가득한 다른 섬들이 늦가을임에도 푸른 기운을 띨 때, 뼈처럼 견고한 빛을 내뿜는 금강죽봉은 저 멀리 북태평양으로 곧은 시선을 보낸다. 용모는 굳세지만 온유하며 자태는 늠름하면서도 단아하다.
황홀하게 멈춰 섰던 뱃머리를 동북 방향으로 돌린다. 왼쪽으로 지죽대교를 두고 지나 도화면 동남쪽 해안으로 다가간다. 육지 끄트머리 암석 언덕이 바다에 발을 담근 곳에서 기묘한 바위가 보인다. 활개바위다. 오랜 세월 바닷바람과 바닷물이 높이 15m 정도 되는 바위 한쪽에 폭 3m가량 구멍을 세로로 길게 뚫어 놨다. 흔히 석문이라고들 부르는데, 물에 몸을 반쯤 담근 거인이 한쪽 팔을 벌려 땅을 짚고 있는 모양새다.
고흥 도화면 내촌리 활개마을. 코끼리 코처럼 보이는 건 착시일까.활개바위라고 이름 붙인 연유는 좀 싱겁다. 1580년에 이순신 장군은 이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발포 수군진성(鎭城)에 수장인 만호로 와서 18개월 있었다. 훈련 중 장군이 내린 명령에 따라 깃발을 흔들어 수병들에게 알렸다고 한다. 이 바위 모양이 활개 치듯 휘날리는 깃발 같아서 그렇게 부른다는 게다. 글쎄다.
● 이름에 값하는 유래 찾기
사실 금강죽봉이라는 이름도 석연치 않기는 마찬가지이다. 지죽도에 사람들이 마을을 이뤄 살기 시작한 것은 대략 400년 전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왜 금강죽봉이라 부르는지 정확히 아는 사람은 없는 것 같다.
죽봉은 이해할 만하다. 금강죽봉을 잘 보면 어떤 봉우리는 단층선이 수평으로, 다른 봉우리는 사선으로, 두세 줄씩 나 있다. 결혼식 피로연에 등장하는 3층 케이크를 연상시킨다고나 할까. 그 단층선들이 멀리서 보면 대나무 마디로 보일 법하다. 어마어마한 대나무가 하늘을 찌를 듯 솟아 있기에 죽봉이다.
그러나 왜 ‘금강’이 붙었는지 똑떨어지는 설명이 없다. 금강산을 줄여 놓은 것 같기도 하고, 관동팔경 중 으뜸으로 꼽히는 동해안 주상절리대(帶) 해금강 총석정 같다고도 한다. 그래서 금강이라는 얘기인데 다소 심심하다. ‘금강산에서 1만2000봉을 모집한다는 소식에 남쪽 바다 죽봉이 황급히 가다 그만 시간이 지체돼 이곳에 머물렀다’ 같은 전설도 없다. 아쉽다.
이 아쉬움을 달래 보려고 나름대로 이름값에 걸맞은 유래를 생각해 봤다.
금강은 불교에서 벼락 또는 가장 단단한 것, 즉 다이아몬드를 말한다. 세상에서 가장 강한 것이다. 이 때문에 가장 뛰어난 것이나 훌륭한 것을 비유하는 말로 자주 쓴다(‘한국불교문화포털 불교용어’). ‘금강신(身)’은 부처의 몸을 말한다. 언뜻 금강죽봉은 가부좌를 틀어 왼손은 무릎 위에 두고 오른손은 땅을 가리키는 석가세존의 용자(容姿)를 표현한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죽봉도 심상치 않다.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에 따르면 불교와 대나무는 인연이 깊다. 불교 최초의 절은 대나무숲 동산에 지은 죽림정사(竹林精舍)다. 대나무는 승려의 수행을 상징하는 죽비가 됐고, 고승들의 지팡이로 이용됐다.
금강죽봉 북동쪽 활개바위를 처음 봤을 때 직관적으로 떠오른 것은 코끼리였다. ‘거인의 한쪽 팔’은 영락없는 코끼리 코였다. 불교에서 코끼리는 위용과 덕을 나타낸다. 부처님을 오른쪽에서 모시는 보현보살은 자비를 상징하는데, 그는 흔히 코끼리를 타고 있다.
수행으로 본성을 깨닫는 과정을 그린 심우도(尋牛圖)에서 소는 ‘인간의 본래 자리’를 상징한다고 한다. 금강죽봉이 있는 지죽도를 하늘에서 보면 소가 누워 있는 모양인 와우형이다(‘한국의 섬: 강진군 고흥군 보성군 장흥군’, 이재언 지음, 이어도, 2021). 금강죽봉이 있어야 할 자리로는 더할 나위 없다.
● 삼치, 유자, 천경자
나로도 수협 위판장에 경매를 위해 나온 아침 생선들.이튿날 오전 8시 나로도호 수협 위판장에서 경매가 시작됐다. 참돔, 병어, 붕장어, 붉바리, 갈치 등을 채운 나무상자들 사이에 삼치가 서너 마리 보인다. 새벽 조황이 별로였나 보다. 그러나 보통 식당 삼치구이에 나오는 삼치를 생각하면 오산이다. 길이가 1m에 육박하거나 훌쩍 넘기도 한다.
선착장에 정박한 삼치잡이 배는 다른 고깃배와 사뭇 다르다. 조타실 양쪽에 길이가 5m는 됨직한 대나무가 각각 서 있다. 어장에 도착하면 낚시가 줄줄이 달린 낚싯줄 십여 개를 각 대나무에 매달아 내리고 배를 달린다. 삼치들이 뒤쫓아와 낚시를 문단다. 이른바 채낚기 방식이다. 1970년대까지는 안강망이나 유자망을 사용했지만 그때는 삼치가 아주 많을 때였다.
한겨울이 제철인 삼치회를 처음 먹어 봤다. 아주 연해서 두툼하게 썬 살을 고흥 특유의 양념장에 찍어 묵은지와 함께 마른 김으로 싸 먹는다. 따뜻한 밥 한술과 같이 먹어도 별미다. 한겨울 삼치는 ‘지방이 오를 대로 올라 치즈 향까지 살짝 난다’는 사람도 있다.
지난달 초 열린 유자축제 현장. 우주비행사 인형이 창문 틈으로 뭔가 찾고 있다.고흥은 5월에 우주항공축제, 11월에 유자 축제를 연다. 최근 누리호 발사에 성공한 나로도 나로우주센터와 국내 생산량의 60%를 차지하는 유자가 고흥의 주축인 셈이다. 지난달 초 열린 유자 축제에서 눈길을 끈 건 행사장 몇 곳에서 유자와 함께 있는 크고 작은 우주비행사 인형이었다.
고흥아트센터에서 7일까지 열리는 ‘천경자: 리마스터전’ 실감영상실. ‘미인도’가 펼쳐진다.그리고 천경자가 있다. 그의 가족은 광복을 즈음해 가산을 날린 부친 탓에 ‘북간도를 향하는 기분으로 고향을 버리고 광주로 갔다.’ 그의 ‘완전한 귀향’을 고흥은 바라고 있다. 지난해 탄생 100주년 기념 전시회를 연 데 이어, 올해도 그가 서울시립미술관에 기증한 작품 63점을 프린팅해 ‘리마스터전’을 7일까지 연다. 고향 출신 생존 화가를 위해 미술관을 세운 어느 도시에 비하면 아직 생가도 복원하지 못했으니 갈 길이 좀 멀긴 하다. 그래도 그 이름에 값하는 결실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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