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신라 이전 동·서탑 자리 확인, 1400년전 황복사 추정지

  • 뉴시스
  • 입력 2019년 5월 15일 11시 1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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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남산 황복사지에서 통일신라 이전에 동탑과 서탑이 서 있던 자리가 드러났다.

성림문화재연구원이 3차 발굴조사 중인 사적 제163호 경주 낭산 일대에서 통일신라 이전에 만들어진 황복사 추정 금당지와 쌍탑지, 중문지·회랑지 등이 배치된 것으로 보이는 추정지를 확인했다.
통일신라 이후에도 국보 제37호 황복사지 삼층석탑과 함께 조영된 대석단 기단과 십이지신상 기단 건물지, 회랑지도 확인했다. 금동입불상, 금동판불, 비석 조각, 치미, 녹유전 등 유물도 700점 넘게 나왔다.
연구원은 16일 오후 1시30분과 3시에 발굴현장과 출토유물을 공개한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황복사는 654년 의상 대사(625~702)가 29세에 출가해 허공을 밟고 올라가 탑돌이를 했다는 설이 있다. 황복사에 목탑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1942년 황복사지 삼층석탑을 해체 수리할 때 나온 사리함에서 확인된 ‘종묘성령선원가람(宗廟聖靈禪院伽藍)’ 명문을 통해 종묘 기능을 한 왕실사원으로도 추정된다.
2016년 1차 발굴조사에서는 제34대 효성왕(737~742)으로 추정되는 인물을 위한 미완성 왕릉, 건물지, 남북도로를 확인했다. 2017년 2차 발굴조사에서는 통일신라 시대 십이지신상 기단 건물지, 대석단 기단 건물지, 부속 건물지, 회랑, 담장, 배수로, 도로, 연못 등 신라 왕실사원임을 추정할 수 있는 대규모 유구와 금동불상 7점 등 유물 1000여점을 출토했다.

2018년 12월 시작한 3차 발굴조사에서는 1금당-2탑-중문으로 추정되는 사찰 건물지가 남북으로 난 일직선에 배치된 형태를 확인했다.

금당지는 정면 7칸, 옆면 4칸으로, 규모는 동서 28m 남북 16m다. 탑지는 동서로 일직선상에 대칭되게 6×6m의 규모로 2기가 확인됐다. 너비 1.5m의 줄기초 위에 원형 적심과 초석을 올린 형태다. 평면배치와 형태로 볼 때 목탑지로 추정된다.

규모가 작고 주변에 비각(碑閣)이 있으며 중문지와 가까이 있는 점으로 볼 때, 이후에 축조된 종묘와 관련된 제단일 가능성도 있다. 중문지는 초축과 중축이 이뤄졌고 규모는 정면 3칸, 옆면 2칸이다.
초축 연대는 중문지 적심과 추정 목탑지에서 출토된 짧은다리굽다리접시 등 토기와 연꽃무늬 수막새 형식으로 볼 때 6세기 후반으로 판단된다. 이후 제32대 효소왕(692~702) 때는 황복사지 삼층석탑이 조영되면서 왕실사원으로서 종묘 기능을 한 동서 방향의 대석단 기단 건물이 만들어졌다.

경주 황복사지 삼층석탑과 동시에 축조된 1호 대석단 기단은 현재 남아있는 길이가 남북으로 30m다. 2호 대석단은 남북으로 길이 57.5m, 동서로 길이 20m다. 가장자리에는 들보 사이가 한 칸으로 된 단랑의 회랑을 돌렸다.

1호 대석단의 상단에는 삼층석탑, 2호 대석단의 대회랑 내부에는 비각 만이 존재하는 특별한 공간이 마련된 것으로 보아 신라 왕실의 종묘적 기능을 담당한 특수 시설로 판단된다.

2017년 2차 조사에서 확인한 십이지신상 기단 건물지는 동쪽에서 묘(卯), 사(巳), 오(午), 미(未)가 조각된 4구였는데 이번 조사에서는 북쪽에서 축(丑), 자(子), 해(亥), 술(戌) 4구를 추가로 확인했다.

십이지신상 탱석은 왕릉에서 옮겨와 건물지의 기단석으로 재사용된 것으로, 전(傳) 황복사지로 추청되는 1차 금당지 일부를 훼손하고 축조됐다. 탱석, 면석, 갑석으로 판단해 볼 때 왕릉 크기는 지름 15~16m로 추정된다.

 【서울=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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