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의 옛친구가 하룻밤 묵으러 온다는 얘기에 남편 심기는…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8월 11일 12시 4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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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곳에서는 날 오라 하여도 내 쉴 곳은 작은 집 내 집 뿐이리~.”

제목은 ‘즐거운 나의 집’이지만 이 동요를 부르다 보면 뭔가 슬프다. 이 집구석을 박차고 나가면 즐거운 일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지만 나는 내 작은 집을 떠나지 못한다네 하는 자조의 느낌도 있고 집 떠나면 고생이라는 옛말 때문에 주저앉는 무력함이 떠오르기도 한다. ‘뜸북뜸북 뜸북새 논에서 울고~’하는 오빠 생각이나 섬집아기를 부를 때에도 슬픈 기분이 든다. 비단 노래 뿐만 아니라 가족 가정 집 부모 형제 이런 단어들이 주는 느낌은 기쁨이나 행복과 함께 슬픔이나 불행도 떠오르게 한다.

가정은 과연 행복의 요람인가? 가족구성원들의 숙명이 교차되는 장소니 모든 희노애락이 모일 수 밖에 없는 곳이 가정이다. 가족의 탄생을 재구성해보면 가정 안에서 일어나는 기쁨과 슬픔을 알 수 있다. 가족이란 이름으로 묶이기 전의 구성원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타인이었다. 낯선 사람들이 모여 가정을 이루고 가족이 된다는 것은 가정이 가져다줄 행복과 안위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의 경우를 기꺼이 감당하겠다는 약속이 아닐까?

레이먼드 카버의 소설 ‘대성당’은 사람과 사람의 만남을 극사실주의로 묘사해나간다. 아내의 옛친구가 하룻밤 묵으러 온다는 얘기를 들은 남자의 심기가 편할 리 없다. 게다가 찾아올 손님은 시각장애인이다. 이 사실을 뻔히 알면서 손님이 오면 볼링이나 치러 가자며 남편은 어깃장을 놓는다.

이윽고 손님이 오고 불편한 식사자리가 이어진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틀어놓은 TV에서 성당에 관한 다큐멘터리가 흘러나온다. 손님은 성당의 생김생김에 관해 궁금해하고 남자주인은 설명을 해주지만 앞을 못 보는 사람에게 형태를 설명한다는 것은 역부족이다.

그때 손님의 제안으로 성당을 그리기로 한다. 두 사람은 손을 포개잡고 성당을 그려나간다. 눈을 감고 그려보라는 손님의 말에 주인도 눈을 감고 그려나간다.

‘우리는 계속했다. 내 손이 종이 위를 움직이는 동안 그의 손가락들이 내 손가락들을 타고 있었다. 살아오는 동안, 내 인생에 그런 일은 단 한번도 없었다. 그때 그가 말했다. “이제 된 것 같은데. 해낸 것 같아.” 그는 말했다. “한번 보게나. 어떻게 생각하나?” 하지만 나는 눈을 감고 있었다. 조금만 더 눈을 감은 채로 있자고 생각했다. 마땅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어때?” 그가 물었다. “보고 있나?” 나는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나는 우리집 안에 있었다. 그건 분명했다. 하지만 내가 어디 안에 있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다. “이거 진짜 대단하군요.” 나는 말했다.

행복만이 가정이 존재해야 하는 이유가 아닐지도 모른다. 아직 본 적이 없는 맹인의 대성당처럼 눈을 뜬 사람들조차도 가정의 본래의 모습을 보지 못 하는 지도 모른다. 모두가 막연히 오래전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가정에 대한 환상을 갖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가족이 된다는 것은 눈을 감은 채 손을 잡고 서로에게 대성당을 그려주는 일인 지도…. 그러다 어느 순간 ’이거 진짜 대단하군‘ 하며 감탄을 하게 되는 기적이다. 모든 가정에 축복이 있길~.

김창완 가수·탤런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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