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여덟쪽 긴 시에 담긴 36년 詩歷의 두께

  • 동아일보

◇내 몸에 내려앉은 지명(地名)/김정환 지음/144쪽·8000원·문학동네

‘아내가 출근 전에 팔팔 끓여놓고 간/도미 대가리 매운탕 다시 끓여/나 홀로 점심 먹는다. 땀을 뻘뻘 흘려도 (…)얼굴 살 뜯어먹으면 서서히/드러나는 생선/두개골, 광년 너머/지질 연대의.’(‘도미 대가리 매운탕’에서)

60대에 들어선 중년 남성이 홀로 매운탕 점심을 챙겨 먹는 식탁. 그러나 그 남성이 시인이라면, 그저 짠해 보일 법한 그 장면의 메시지는 달라진다.

그는 빨간 매운탕에서 시를 건져낸다. 얼굴 살이 뜯어진 도미 대가리를 보고 순식간에 백악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시심(詩心) 말이다. 인간이 짐승을 뜯어먹는 행위라는 건 얼마나 오래된 것인지. 그렇게 혼자 식탁에 앉은 그와 출근한 아내의 거리는 백악기와 현재의 시간만큼이나 멀다.

이런 시는 또 어떤가. 인간의 언어와 작은 모기의 날갯짓을 비교하는 시구들. ‘모기도 자신의 의미와 감정이랄 수 있는 모종의/미적분 있겠으나 온갖 수사(修辭) 보이지 않는다. 왱왱대지만/가볍고 가는 몸으로 무엇보다 너무 난해한 왱왱이지.’(‘모기 실내’에서)

역사에 기반을 둔 장시(長詩)를 써온 시인이다. 새 시집의 시편들 가운데서도 ‘構想의 具象’이 돋보인다.

식민지 시대부터 21세기에 이르기까지 현대사를 8페이지에 걸친 시로 펼쳐 보인다. 유려한 시어로 역사의 굴곡을 노래한 이 장시는 시인의 36년 시력(詩歷)의 두께를 헤아릴 수 있는 작품이다.

‘구상의 구상은 중력의 수평…그렇게 생이 치솟으며 생애 속으로 이야기를 펼친다. 한국 현대사가 생이고 이야기고 생애고 형상인’.

김지영 기자 kimjy@donga.com
#내 몸에 내려앉은 지명#김정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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